서울 중로구 효자로(孝子路)는 경복궁 서쪽 담과 붙어 광화문 쪽에서 청와대 옆까지 남북으로 난 1.3km 정도의 길이다.
1960년대에는 전차가 다녔다. 청와대에서 원효로 성심여고에 다니던 당시 대통령 딸 박근혜도 더러 이 전차를 탔다.
효자로에서 서쪽 인왕산까지 조선시대 왕궁이 지척인 이 일대에는 숱한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다. 그 속에 스며있는 스토리를 찾아보고 곰새기다 보면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모든게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와, 나는 누구인가 무아(無我)를 사색하며 거닐 수 있다. 그 끝쯤에는 당연히 창의적 발상이 이어진다.
ㅇ 세종 태어나신 곳
태조 6년(1397년) 음력 4월10일 한양 북부 준수방 잠저에서 이성계의 손자 '이도'가 이방원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세종실록). 지금의 통인동, 옥인동 일대에 해당한다.
세종 탄신 614주년이 되던 2011년 양력 5월 15일을 기해 무심코 '서촌'이라 부른 이 지역을, 뜻있는 주민들과 종로구는 세종대왕 탄생지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자 '세종마을'이라 명명하고 선포식까지 가졌다.
ㅇ 창의궁 터 (통의동 35 일대)
1694년 숙종이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혼인시킨 후 1707년 사준 집이 창의궁이 되었다. 조선 21대왕 영조의 잠저가 됐던 것이다. 숙빈 최씨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진종)와 화순옹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ㅇ 백송 터(월성위궁 터; 秋史 金正喜 집터; 통의동 35-15 일대)
열개의 벼루 구멍을 뚫고, 쓰다 뭉갠 붓이 천자루가 넘는다는 19세기 최고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 ‘월성위’라는 작호를 받고지금의 통의동 백송터에 큰 저택을 지어 살았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도 세상을 떠나자 월성위궁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추사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백송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앞 마당에 심었다는데, 이 백송나무가 1990년 7월 낙뢰로 쓰러졌다.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을 구해 심은 인근 할머니의 스토리가 더해져 지금의 백송터로 자리매김했다.
ㅇ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1930년대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예술가들이 서울에서 자리잡기 전에 장기 투숙하며 문학의 열꽃을 피웠던 곳이다.
서정주, 김동리, 이상, 윤동주, 이중섭 등 문인 화가들이 포함돼 있다. 서정주, 오장환 등이 주도하며 1936년 연말 두달간 간행됐던 동인지‘시인부락’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2006년 문을 닫았는데, 역사적가치 덕분에 헐리지는 않지만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수시로 용도가 변하고 있다.
ㅇ 진명여학교 터
고종 42년(1905)에 엄준원이 달성위궁에 사숙을 설치했다가, 이듬해(1906) 4월 누나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로부터 토지와 재물을 기부받아 진명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엄비'라 칭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친왕)의 어머니이며, 양정고, 숙영여대 등의 모태가 되는 양정의숙, 명신여학교 등도 세운 분이다.
진명여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ㅇ 쌍홍문 터
임진왜란 때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가족들과 떠난 강화도로 피난길. 그의 모친을 욕보이려던 왜적을 저지하다가 장남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지고, 작은아들 희철이 모친을 산속으로 피신시켰으나, 싸우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림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들의 효행을 칭송하고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조원의 본가(효자동 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효자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ㅇ 신익희 가옥
제헌국회 부의장,국회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신익희(1894~1956)가 1955년 전후 약 2년간 거주한 곳이다. 목판, 고서, 친필 휘호 등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ㅇ 이광수(春圓 李光洙) 집터(효자동 175-1)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이광수는 11세 때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천도교에서 잔일을 했다고 한다. 1910년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1917년에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8년 부인과 이혼하고 폐결핵을 치료해주던 여의사 허영숙과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논설을 많이 썼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사 객원 논설위원, 1932년에는 '흙'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발표,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던 허영숙과 함께 효자동 175번지에 살기도 했었다.
ㅇ 육상궁, 칠궁(毓祥宮; 七宮)
조선시대 왕을 낳은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된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된 진종의 생모), 영빈 이씨(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의 생모) 등이다.
처음엔 숙빈묘(淑嬪廟,훗날 毓祥廟로 개칭) 하나였으나, 1753년(영조 29)에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다.
당시 궁호(宮號)는 원칙적으로 세자나 세자빈의 사당에 붙였는데, 영조대에 이르러 사친(私親)의 사당에도 궁호를 사용하였다.
1908년(순종2)에 다른 사당들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궁이 되었다.
앙숙으로 유명한 숙종의 두 후궁, 영조의 두 후궁의 사당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뭔가 께름칙하다.
영조는 즉위 2년을 조금 넘긴 뒤부터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을 다녀 오는길에 여러 승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저였던 창의궁에 들르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처럼 궁궐 밖에서 태어 났지만 결국 왕이 된 인물들의 잠저들을 두루 방문했으며, 52년 간의 재위기간중 육상궁에 247회나 참배했다 한다.
ㅇ 그밖에
이름없는 골목 속에 가꾸어진 '수상한' 화단, 김재규가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쏜 궁정동 안가... 숱한 근현대사가 얼키고 설킨 공간에서 우리는....
1960년대에는 전차가 다녔다. 청와대에서 원효로 성심여고에 다니던 당시 대통령 딸 박근혜도 더러 이 전차를 탔다.
효자로에서 서쪽 인왕산까지 조선시대 왕궁이 지척인 이 일대에는 숱한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다. 그 속에 스며있는 스토리를 찾아보고 곰새기다 보면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모든게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와, 나는 누구인가 무아(無我)를 사색하며 거닐 수 있다. 그 끝쯤에는 당연히 창의적 발상이 이어진다.
ㅇ 세종 태어나신 곳
태조 6년(1397년) 음력 4월10일 한양 북부 준수방 잠저에서 이성계의 손자 '이도'가 이방원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세종실록). 지금의 통인동, 옥인동 일대에 해당한다.
세종 탄신 614주년이 되던 2011년 양력 5월 15일을 기해 무심코 '서촌'이라 부른 이 지역을, 뜻있는 주민들과 종로구는 세종대왕 탄생지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자 '세종마을'이라 명명하고 선포식까지 가졌다.
ㅇ 창의궁 터 (통의동 35 일대)
1694년 숙종이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혼인시킨 후 1707년 사준 집이 창의궁이 되었다. 조선 21대왕 영조의 잠저가 됐던 것이다. 숙빈 최씨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진종)와 화순옹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ㅇ 백송 터(월성위궁 터; 秋史 金正喜 집터; 통의동 35-15 일대)
열개의 벼루 구멍을 뚫고, 쓰다 뭉갠 붓이 천자루가 넘는다는 19세기 최고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 ‘월성위’라는 작호를 받고지금의 통의동 백송터에 큰 저택을 지어 살았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도 세상을 떠나자 월성위궁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추사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백송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앞 마당에 심었다는데, 이 백송나무가 1990년 7월 낙뢰로 쓰러졌다.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을 구해 심은 인근 할머니의 스토리가 더해져 지금의 백송터로 자리매김했다.
ㅇ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1930년대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예술가들이 서울에서 자리잡기 전에 장기 투숙하며 문학의 열꽃을 피웠던 곳이다.
서정주, 김동리, 이상, 윤동주, 이중섭 등 문인 화가들이 포함돼 있다. 서정주, 오장환 등이 주도하며 1936년 연말 두달간 간행됐던 동인지‘시인부락’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2006년 문을 닫았는데, 역사적가치 덕분에 헐리지는 않지만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수시로 용도가 변하고 있다.
ㅇ 진명여학교 터
고종 42년(1905)에 엄준원이 달성위궁에 사숙을 설치했다가, 이듬해(1906) 4월 누나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로부터 토지와 재물을 기부받아 진명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엄비'라 칭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친왕)의 어머니이며, 양정고, 숙영여대 등의 모태가 되는 양정의숙, 명신여학교 등도 세운 분이다.
진명여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ㅇ 쌍홍문 터
임진왜란 때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가족들과 떠난 강화도로 피난길. 그의 모친을 욕보이려던 왜적을 저지하다가 장남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지고, 작은아들 희철이 모친을 산속으로 피신시켰으나, 싸우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림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들의 효행을 칭송하고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조원의 본가(효자동 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효자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ㅇ 신익희 가옥
제헌국회 부의장,국회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신익희(1894~1956)가 1955년 전후 약 2년간 거주한 곳이다. 목판, 고서, 친필 휘호 등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ㅇ 이광수(春圓 李光洙) 집터(효자동 175-1)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이광수는 11세 때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천도교에서 잔일을 했다고 한다. 1910년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1917년에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8년 부인과 이혼하고 폐결핵을 치료해주던 여의사 허영숙과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논설을 많이 썼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사 객원 논설위원, 1932년에는 '흙'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발표,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던 허영숙과 함께 효자동 175번지에 살기도 했었다.
ㅇ 육상궁, 칠궁(毓祥宮; 七宮)
조선시대 왕을 낳은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된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된 진종의 생모), 영빈 이씨(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의 생모) 등이다.
처음엔 숙빈묘(淑嬪廟,훗날 毓祥廟로 개칭) 하나였으나, 1753년(영조 29)에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다.
당시 궁호(宮號)는 원칙적으로 세자나 세자빈의 사당에 붙였는데, 영조대에 이르러 사친(私親)의 사당에도 궁호를 사용하였다.
1908년(순종2)에 다른 사당들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궁이 되었다.
앙숙으로 유명한 숙종의 두 후궁, 영조의 두 후궁의 사당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뭔가 께름칙하다.
영조는 즉위 2년을 조금 넘긴 뒤부터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을 다녀 오는길에 여러 승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저였던 창의궁에 들르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처럼 궁궐 밖에서 태어 났지만 결국 왕이 된 인물들의 잠저들을 두루 방문했으며, 52년 간의 재위기간중 육상궁에 247회나 참배했다 한다.
ㅇ 그밖에
이름없는 골목 속에 가꾸어진 '수상한' 화단, 김재규가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쏜 궁정동 안가... 숱한 근현대사가 얼키고 설킨 공간에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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