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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2

한강의 밤 ㅡ 뚝섬한강공원(7호선 자양역) 빛섬축제장에서


한강의 밤

바람은 강물 따라 스치고 별없는 하늘로 빛 담은 분수 솟구친다 그 자체로 질문이다 어둠 있어야 빛 있다는 걸 우린 왜 밤에만 생각할까 빛 멈추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제 어둠이 두렵지 않다 ㅡ 뚝섬한강공원(7호선 자양역) 빛섬축제장에서







2024-11-28

제주도 사흘 여행코스

제주도는 뛰어난 학술적 가치와 아름다운 경관을 지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섬 한가운데 쯤에 1950m의 한라산이 솟아있으며, 그 주변 여기저기 신비스럽기까지 한 여러 형태의 오름이 360여 개나 된다. 이 오름을 전에는 흔히 기생화산이라고도 일컬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제주도 관광권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눠보면, 제주시와 한라산을 중심으로 양 옆의 동부, 서부권역, 그리고 서귀포롤 중심으로 한 남부권역이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서 출발한다 치면, 우선 일주도로에서 우회전-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일주도로와 해안도로를 드나들려면 우회전으로 진입할 수 있어야 편리하기 때문이다. 마음 끌리는 올레길을 만나면 잠시 주변에 차를 세우고 걷기도 편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항 도착 첫 날은 서쪽지역을 거쳐 숙소로 향한다. 서부지역은 공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서 이호테우해변, 애월 몽상드, 한림 협재해수욕장, 산방산 용머리해안을 거쳐, 카멜리아힐, 송악산 등으로 이어진다.

제주민속촌박물관둘째 날은 남쪽 지역이다. 제주민속촌,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서귀포 일대, 이중섭 거리, 유명한 올레길 두어군데 걷고, 중문단지와 부근 주상절리 등등…
잘 알려진 성산일출봉은 수많은 제주의 오름들 가운데 상징적 명소로 오래 전부터 해돋이 명소, ‘영주십경(瀛州十景)’에서 제1경으로 꼽혀왔다. 한라산과 함께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으로 2000년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됐다. 지구의 신생대 후기쯤 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기억하기 쉽게 대략 10만 년 전쯤이라치고 수심이 얕은 해저에서 화산이 분출하여 본래는 제주 본섬과 떨어진 섬이었지만 그 사이에 모래 자갈이 쌓여 지금처럼 연결됐다. 높이는 183m에 불과하지만 바닷가라 제주 동쪼으로 들어서면 우뚝 솟아 보인다. 매표소를 지나 처녀바위, 등경돌, 초관바위, 곰바위를 지나 전망대에 올라서면, 한라산 동쪽 수많은 오름들이 훑어진다. 꼭대기에는 지름 600m, 바닥면의 높이가 90m나 되는 거대한 분화구도 있다.
일출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은 일출봉 정상 보다 그 옆 광치기해변이다. 일출봉과 성산읍내를 잇는 모랫길이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해가 뜰 때까지 차안에서 기다리기도 좋다. 

셋째 날은, 동쪽 해안 따라 공항 방향으로 가면서, 월정리 해변카페, 김녕, 함덕, 조천 스위스 마을,절물자연휴양림, 성판악, 신비의 도로, 공항 근처 용두암 등등 중에서 선택해 볼 수 있다.
방향이 직선이 아니니 지도를 놓고 전체를 조감한 뒤에, 결국 몇 개는 포기해야 한다.
관광 도중의 식당은 코스와 함께 미리 정해 놓으면, 행동 제약을 너무 많이 받게되니, 몇 개 리스트를 갖고 있다가 배고플 때 인근에서 알아보거나 하는 방법이 좋을 듯…

제주 사람들조차 제주의 내일 날씨는 내일이 되어도 모른다고 한다. 해가 뜨더라도 수평선 자락에 두텁게 내려앉은 구름과 해무가 때로는 방해가 되고 때로는 더 큰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 해변의 새벽을 깨우는 건 사진작가들의 셔터소리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다.

2024-11-26

세종마을(서촌)과 윤동주(尹東柱)

윤동주(尹東柱: 1917~ 1945.2) 하숙집

북간도 출생으로 1938 연희전문 문과 입합해 아현동, 서촌 일대 하숙생활했다.
1939년 ‘소년(少年)’지 통해 등단.

1941년 후배 정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 누상동 집에서 하숙. 이곳이 서촌의 윤동주 하숙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작품들이 이 무렵 전후 탄생했다.
1941년 12월 연전 졸업한 후, 시집 내려던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1942년 3월 일본으로 떠났다.
릿교(立敎)대를 거쳐 교토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사상범으로 체포…
징역 2년 선고를 받았다. 
후쿠오카형무소 복역중 건강악화, 요절했다.(생체실험 피해설도 있다)

정병욱(1922~1982)
학병 끌려가며 어머니에게 윤동주 원고 부탁
1948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했다.
정지용(鄭芝溶) 서문과 강처중(姜處重)의 발문 및 유령(柳玲)의 추모시…「서시(序詩)」 포함한 31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창의문 / 청운공원 주변

윤동주 문학관임 2012년 7월 개관됐다.
수도가압장으로운우영되다가 폐쇄된 곳으로 윤동주 이야기 입고 새롭게 탄생했다.
정문 왼쪽 나무덱계단과 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에는 150년 된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나무 아래에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序詩)‘ ㅡ  언덕 아래 작은 정자가 서시정(序詩亭)이다.

인근의 청운문학도서관은 2014년 11월 개관한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다.

2024-11-24

가을바다 꽃지해안

대천에서 보령해저터널로 원산도를 거쳐 안면도로 이어지는 대교를 넘으면 바로 꽃지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서늘해진 날씨지만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많다. 대천의 밤바다, 꽃지로 들어가는 바다 갈라진 길...




2023-10-29

'다카마쓰' 간 김에 '나오시마' & '데시마'까지...

우리나라와 연결되는 일본 시코쿠지역 국제공항은 마쓰야마, 다카마쓰 두 곳이다.
이들 공항에서 외국인 여행객을 대상으로 판매하는’ALL SHIKOKU Rail Pass’- 시코쿠내 6개 철도선을 이용할 수 있다. 3~7일권 국내서 구입하는 것이 현지보다 저렴하다(11만300원~).
다카마스가 속해 있는 가가와현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다. 사누키우동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우에하라야 본점(さぬき うどん 上原屋 本店)은 육수 토핑 추가하여 나만의 우동을 만들고 튀김을 선택해 먹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 스타일. 적지 않은 우동집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뽑낸다. 
다카마쓰항과 역 부근에는 걸어다닐 만한 시내 여행지도 수두룩하다. 아래에 손질하지 않고 짜깁기처럼 소개해 본다.
ㅇ 리츠린 공원(栗林公園); <미슐랭그린가이드, 재팬>에서 최고점수인 별 3개에 랭킹, 일본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높은 평가. 키쿠게츠테이(掬月亭) 말차....
ㅇ할로우즈(ハローズ 栗林公園店); 24시간 대형마트... 옆에 코인세탁소, drug store도..
ㅇ手打ちうどん 鶴丸 테우치우동 츠루마루 (오후 8:00~오전 2:00, 일요일 휴무)
ㅇ The Isamu Noguchi Garden Museum 아트뮤지엄
ㅇ Shikoku Mura Village 역사 깃든 마을. 나무로 된 다리를 빠져나가 나무로 된 마을. 갤러리에 피카소의 그림, 모네의 편지, 물의 정원 등…
ㅇ Takamatsu Castle & Tamamo Park 바닷물 해자로 둘러싸인 3대 성(다카마츠) 성터를 공원으로 개방.
ㅇ레스토랑 미케일라 https://www.mikayla.jp/
ㅇ다카마쓰 심볼 타워
ㅇ메리켄야 다카마쓰 역전점; 다카마츠 역 앞, 유명한 우동집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ㅇ사누키멘교 효고마치본점 さぬき麺業 兵庫町店
ㅇ후게츠(手打ちうどん 風月); 금요일(문화의 날, 시간 변동 가능) 오전 11:15~오후 2:00)
ㅇTakamatsu Central Shopping Street(高松中央商店街)
ㅇ다카마쓰시립 중앙공원
ㅇ타카마츠시 미술관(高松市美術館); 카가와 현립 미술관보다 나은듯... 전시 구성, 영어 설명, 입장료 저렴, 입장료에 비해 과한 작품...
ㅇKammidiya Budounoki (甘味茶屋 ぶどうの木); 도시락, 간식... 별로...
ㅇ호네츠키도리 잇카쿠 타카마츠점(骨付鳥 一鶴 高松店; 닭요리전문점); 인기 많은 곳.
ㅇ북카페 '半空'(珈琲と本と音楽); 재즈, 커피, 칵테일...
ㅇ미나미 커피(南珈琲店); 남녀노소, 예전 커피 문화...
ㅇUdon Bou(うどん棒 高松本店) 오전 11:00~오후 2:30, 오후 5:00~7:30

[멀리 떨어진 곳]

ㅇ기타하마 alley 석양 https://www.kitahama-alley.com/
ㅇ붓쇼잔 온천 토/일요일 오전 9:00~오전 12:00 금/월 오전 11:00~오전 12:00
고토히라(琴平)지역(월요일 가능)
카가와현 온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곤피라 온천마을. 일본 각지 고토히라 신사의 총본산, 고토히라궁도 있다.
ㅇ킨료 사케 뮤지엄 양조장 (金陵の郷) https://www.nishino-kinryo.co.jp/museum/
ㅇ곤피라 쇼유 마메 혼포(こんぴらしょうゆ豆本舗 参道店) 우유 깊은 맛나는 아이스크림, 소스랑 파가 올라가는 토핑도...
ㅇ나카노우동학교 코토히라점 A관(中野うどん学校 琴平校A館)
ㅇKotohira Maritime Museum
(ㅇ콘피라 카부키(金毘羅大芝居; 金丸座))
ㅇKonpira Omotesando こんぴら表参道 ~~~ 기념품 상점가 ~~
ㅇ金刀比羅宮 大門(おおもん),ㅇ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 카가와에서 손꼽히는 단풍 명소. 매년 11월 10일 단풍축제.~~~
ㅇ코토히라 온천 시키시마칸ことひら温泉 御宿 敷島館 무료족욕?
ㅇ Kotosankaku(琴参閣) 온천호텔... 탕만 가능? =>고토덴 고토히라(琴平)역
야시마(屋島) 방향
ㅇ시코쿠민가박물관 「시코쿠무라」(화요일 휴뮤)
ㅇ야시마루 & 屋島展望台 석양
ㅇ옥도사 (전망대)
ㅇTakamatsushi Ishinominzoku Museum (高松市石の民俗資料館; 월요일 휴뮤, X?)
* 전철 1일권(코토덴, JR)|ことでんJRくるり~んきっぷ
ㅇ고토덴 기본요금 190엔, 여러곳 방문계획이면 고토덴 1일권... 어른용 1.230엔
ㅇ가와라마치(瓦町駅); 다카마쓰칫코역에서 출발, 두번째 카와라마치역에서 세개의 노선으로 갈라짐. 고토히라선은 2번, 나가오선 3번.... 플랫홈
ㅇ요산(予讃)선 다카마츠(高松)~다도츠(多度津), 도산(土讃)선 다도츠(多度津)~코토히라(琴平), 코토쿠(高徳)선 다카마츠(高松)~시도(志度), 코토덴(다카마츠코토히라 전기철도)의 전 구간.
※대상: 지정 구간은 쾌속・보통 열차 자유석 이용. (코토덴 버스는 이용 불가)
메기지마 & 오기지마 고토덴 주변
ㅇ菊池寛記念館 기쿠치칸 기념관 (월 휴무)
ㅇ중앙도매시장의 ‘우미마치 상점가’- 쇼와시대(1926~1989년)의 분위기 감도는 복고풍 공간... 식사, 쇼핑, 예술, 경매나 배낚시 등 다양한 체험 콘텐츠...
ㅇ Yashima 산
ㅇ Yakuriji Temple or Yashima-ji Temple
ㅇ Ogijima Island 섬

[배 타고 떠나보자 ㅡ 다카마쓰 북쪽 13㎞에 있는 섬 나오시마]

원래 구리 제련소. 폐기물로 황폐화되어 죽어가던 섬. 출판기업인 ‘베네세’가 1989년 시작한 ‘아트 프로젝트’–> 섬 전체를 하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섬이 갖는 자연환경에 '문화'가 가득하다. 일본의 천재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중미술관’은 땅 속에 들어가 있는(地中) 미술관이다, ‘베네세 하우스’는 호텔의 기능이 접목된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파격적 형태의 이 미술관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산 위에 있는 계단식 밭 형태의 염전 터 지하- 자연광을 받아들여 시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는 매력… 프랑스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3명의 작품만 전시한다.
그 뿐인가? 미니멀리즘을 동양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미술작가 이우환의 작품을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이우환 미술관’.... 큐사마 야요이의 빨강호박과 노랑호박...

월요일엔 쉬는 곳 많아... 
다카마쓰에서 출발할 경우엔 0812 0902 다카마쓰항에서 페리로 나오시마(四国汽船 宮浦港 Shikoku Kisen, Miyanoura Port).
ㅇ 빨간 호박 (赤かぼちゃ,草間彌生 쿠사마 야요이가 만든 유명한 대형 호박 조각품)
ㅇ 地中美術館〔予約制〕https://www.e-tix.jp/chichu/?_gl=1*ohnmln*_ga*MTkwNzk5NTQ4NS4xNjYyMzQ5NzI4*_ga_251YPPM1T3*MTY4MjQwODk4MC4zNDguMS4xNjgyNDA4OTg2LjU0LjAuMA..
Chichu Garden, & Cafe
ㅇANDO MUSEUM10:00-13:00 / 14:00-16:30(최종 입관 16:00)
ㅇ베네세 하우스 박물관8:00-21:00(최종 입관 20:00) * 발레 갤러리는 9:30-16:00 (최종 입관 15:30)
ㅇ李禹煥 미술관10:00-17:00(최종 입관 16:30) https://benesse-artsite.jp/art/lee-ufan.html
ㅇ 無限門 李禹煥미술관의 야외전시의 상징적 작품. 세토나이카이를 바라보는 거대한 아치에서 다양한 변화의 자연을 느껴본다. https://benesse-artsite.jp/story/20220924-2456.html
나오시마 목욕탕 「I♥탕」13:00-21:00(최종 접수 20:30)
ㅇ Yellow Pumpkin (南瓜)
ㅇ Valley Gallery 베네세 하우스 박물관 입장료에 포함 (발레 갤러리 현지에서도 동 티켓을 구입 가능) https://benesse-artsite.jp/art/benessehouse-museum.html#valleyG
ㅇ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 JPY1,300. 1992년 "자연·건축·아트의 공생"을 컨셉으로 미술관과 호텔이 일체가 된 시설로 개관. 세토나이카이를 바라보며, 섬의 ​​자연을 내부로 이끌어 넣는 구조의 건물은, 안도 타다오의 설계. 회화, 조각, 사진, 설치 등의 수장 작품의 전시. 아티스트들은 스스로 장소를 선택하고 작품 제작. 작품은 특정 전시 공간이 아니라 관내 도처에 설치되어 시설을 둘러싸는 해안선이나 숲 속에도 점재. 나오시마의 자연을 향한, 또는 건축에 촉발된 작품 등, 미술관의 내외에 점재하는 사이트 스페시픽 워크와 아울러, 자연과 아트와 건축이 융합하는 희귀한 장소를 만들어 내고 있다. https://benesse-artsite.jp/art/benessehouse-museum.html
ㅇ Seen/Unseen Known/Unknown (見えて/見えず 知って/知れず)
ㅇ Benesse House Area East Gate

버려진 집에 예술을 접목한 '이에(家)프로젝트'(Art house project)'

1998년 나오시마의 빈집 7채가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손길에 의해 현대작품으로 재탄생... 인근 섬 이누지마에도 같은 프로젝트 진행, 5채의 빈집들이 갤러리 겸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변신.... 전 세계로부터 찾아온 관광객들의 발길 이어져... 예술작품이 된 빈집들은 관광객 뿐만 아니라 섬 주민들에게도 시각의 즐거움을 제공.... 제어할 수 없이 불어나는 빈집을 전면 철거가 아닌, ‘활용’에 방점... 그중 하나가 ‘예술’... ‘예술 섬’이 된 나오시마는 ‘현대미술의 성지’... 이에 프로젝트와 더불어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과 예술 작품들이 있기 때문....
ㅇ이에 프로젝트(카쿠야, 이시바시, 예)10:00~12:00 / 13:00~16:30
ㅇ이에 프로젝트(난지·고왕 신사·바둑회소) 10:00-13:00 / 14:00-16:30 (“난지” 최종 입관 16:15)
...팜플렛 첫번째 집. 물로 채워진 다다미방 안에 디지털 숫자들이 깜빡인다.
... Art House Project: Ishibashi (家プロジェクト「石橋」)....
... 미나미데라 (家プロジェクト「南寺」)...
... Art House Project: Go'o Shrine 家プロジェクト「護王神社」...
... Art House Project: Gokaisho 家プロジェクト「碁会所」...
... Art House Project: Haisha 家プロジェクト「はいしゃ」...
ㅇ 안도 뮤지엄 (오전 10:00~오후 1:00, 오후 2:00~4:30, 월요일 휴무)https://benesse-artsite.jp/art/ando-museum.html
ㅇ Bezaiten (弁財天) Summer Pockets(서머 포켓)의 무대가 된 성지 「나오시마」의, 시로하가 낚시를 하던 스포트
ㅇ pan tocori 크로와상, 바게트, 플레인빵 등 심플한 빵들만 내부 사진 못찍게~~
ㅇ 1700 1800 나오시마 다카마쓰항
ㅇ다음날 (일요일)
0741 0816 다카마쓰 데시마Ieura항
9:07 9:37 9:57 다카마쓰- 혼무라항- 데시마Ieura항
1510 1530 Ieura항 나오시마 혼무라항 경유 다카마쓰 또는
1720 1755 Ieura항 다카마쓰

데시마(豊島)

다카마츠 항에서 페리로 35분, 카가와 현과 오카야마 현의 거의 중간. 푸른 바다와 백사장, 수많은 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9헥타르 사면에 펼쳐진 계단식 논밭... 현대 미술관으로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섬...
테시마미술관 (화요일 휴무, 개관 오전 10:00~오후 4:00)
미술관 바닥에서 물이 흘어나와 샘이 탄생하는 작품 '모형(母型)'... 바람과 빛이 들어오는 2개의 개구부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유기적인 예술 작품...
심장음 아카이브
전 세계 사람들의 심장 소리에 맞추어 전구 불이 깜빡이는 설치 미술,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리스닝 룸, 심장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레코딩 룸.....

다카마쓰 간략 정리... 참고할 웹페이지

다카마쓰 Best60 https://www.art-takamatsu.com/ko/travel/entry-913.html
나오시마 종합 개요https://namu.wiki/w/%EB%82%98%EC%98%A4%EC%8B%9C%EB%A7%88%EC%B4%88
“나오시마(나오시마) 관광 여행 사이트”
(영어 일어 안내라 불편하지만 나오시마초 관광 협회 공식 자주 업데이트 되는 나오시마 정보) https://naoshima.net/en/
다카마쓰항 <-> 나오시마 미야우라항 및 테시마 페리 정보
시코쿠기선/ 다카마쓰-미야우라 https://www.shikokukisen.com/
테시마 페리 / 다카마쓰-IEURA https://www.t-ferry.com/schedule/ 
*** 다카마쓰가 아니라 오카야마공항을 이용할 경우는, 우노항에서 나오시마를 들어가는게 훨씬 편하다*** 

2023-05-22

독일에서 만난 한국 할매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하란다. 뒤로 미루다가 다리 떨릴 나이에는 하고 싶어도 안된다는 뜻이다. 이제 그 임계선 가까이 성큼성큼 다가가는 걸 부인할 수 없는 '연세'. 그래서인가? 올들어 코로나에서 해방되는 낌새를 놓칠세라 제주도, 울릉도, 네팔, 일본에 이어 5월엔 독일여행을 감행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서독 간호사'로 근무했던 아내의 해외동문들 모임이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일정이 계기가 되었다. 열흘 남짓의 짧은 여정을 정리해둔다.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야간열차로 하노버(Hannover Hbf)에 도착하니 밤 11시. 하루 머물며
평소 관심있던 몇개만 훑었다. Marktkirche(Market Church Hannover), Altstadt, Altes Rathaus 등등... 주요 명소를 따라 걷기 좋게 도로에 붉은 안내선을 그어놓은 것이 퍽 도움이 되었다(사진).

2차 세계 대전의 폭탄으로 파괴되어 외벽만 남은 '에게디안(Aegidia)교회'는 폐허가 된 채 오늘날 전쟁기념관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사진). 1347년에 지어져, 하노버 16세기 종교개혁의 모태가 되었다나? 일본 히로시마는 하노버의 자매 도시로 평화의 종을 기증하여 이 교회의 탑에 매달아, 매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날에 울린다고 한다.

하노버에서 열차로 친구가 사는 아킴(Achim)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한적한 도시지만 역에서 걸을 만한 만만한 거리. 수년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약사 남편이 운영하던 약국 자리, 살던 집, 주변의 드넓은 유채꽃밭 등을 둘러보며 함께 가슴이 아팠지만, 많이 회복된 그녀가 대견스러웠다. 이튿날 한참 연하의 골프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브레멘(Bremen)에 다녀왔다. 중세시대 '한자 동맹한자(die Hanse; 13세기부터 독일 북쪽과 발트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15세기 이후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쇠퇴, 17세기에 소멸됐다)의 일원이었던 도시로
그림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소재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농장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쓸모가 없어져 주인에게 버림받은  당나귀, 개, 고양이 그리고 닭 이야기다. 수탉은 시간을 잘 알리지 못해서, 암탉은 알을 잘 낳지 못해서 구박받았다던가?  브레멘 시청 옆에 이 동물 악대를 형상화한 동상이 서있다(사진).

철도 파업이 예고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함부르크로 이동. 행사장 겸 공식 숙소로 정해진 유스호스텔에서 참석자들과 3박4일을 함께 하며 관광하고 밥 먹고 얘기 나누고... 여기서 사흘 밤을 난생 처음 이층 침대에서 잤다.

1960~70년대에 독일에 건너온 '한국 간호사'들이 저마다 간직한 스토리는 대한민국 도약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경탄...! 존경...!
간호사로서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 병원 근무를 하며 겪은 산전수전은 누구에게나 기본.
그 경력을 기반으로 대체의학을 익혀 수많은 봉사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분, 모터 달린 연장까지 직접 다루며 건축 공사도 하며 부동산 전문가가 된 분, 서예 강사, 고전 무용과 삼바 춤 강사가 된 분, 이런 저런 사연이 겹쳐 결혼 세번 하신 분,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다가 돌아가신 후 10억짜리 집과 강아지까지 통째로 상속받으신 분, 지역언론의 기자가 되고 작가가 되신 분... 저마다 소설책 한 권씩 그냥 채워질만한 엄청난 드라마가 이들을 휘감아 빛내고 있다.

함부르크(Hamburg)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항구도시지만 북해로 이어지는 엘베 강 하구에 자리한 도시다. 조수 간만의 차가 적고 파도도 거의 없어 항만으로선 천혜의 조건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도시답게 오래된 건축물과 박물관, 예술 작품 등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불어권과 독일어권, 스칸디나비아와 중남유럽, 북유럽과 남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다.
행사 첫날 저녁 함께 감상한 음악회가 열린 'ELPHI'(Elbphilharmonie Laeiszhalle Hamburg; 사진)는 손꼽히는 공연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곡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항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사진).
이 건물은 1963년부터 2001년까지 NDR(NordDeutscher Rundfunk)방송국의 본사로 사용되기도 전에 '비틀즈(Beatles)'가 처음으로 라이브로 공연한 장소로 유명하다.

1960년 4월 13일, 첫 독일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NDR의 TV 쇼
"Beat-Club"의 녹화를 위해 이 건물을 방문했다. 이 공연은 비틀즈의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Hamburg Period"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았다.

햄버거(Hamburger)와는 어떤 관계일까? 이 도시 사람들의 소고기 패티를 빵에 끼워 먹는 음식문화에서 탄생했다는 설도 많이 유포됐었지만, 아무 관련 없
다는 것이 정설이다. 시내를 걷다보면 'Hamburger ~ ~"라 표기된 간판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건 먹는 햄버거 집이 아니다. 예컨대, 'Hamburger Abendblatt'는 함부르크의 일간지로, "Hamburger"는 함부르크 주민들을 뜻한다. 또한, 'Hamburger Dom'은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축제로, 'Dom'은 '대형 박람회'를 의미한다.

함부르크의 여러 운하(canal)를 통한 보트 여행 코스는 걸어서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아름다운 정원이나 사연이 있는 멋진 건물들을 끼고 지나가며 다양한 건축 양식과 경관을 한 눈에 보게 된다.
이번 행사를 주관했던 동문회장은 함부르크 출발 시간에 여유가 있는 친구들을 초대, 살고 있는 강변의 멋진 빌라에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스위스에서 연하의 회계사 남편과 함께 온 젊은 시절 친구는 근사한 점심도 베풀었다.

함부르크 행사가 끝나고 오래 전부터 별러서 방문한 카셀(Kassel). 작은 도시지만 역사가 길어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의 최대 후원자 중 하나였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그의 맏아들 빌헬름 4세의 후손들이 묻힌 마르틴 교회(Martinskirche)도 명소다.
카셀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대미술작품을 5년마다 전시하는 도쿠멘타(Dokumenta)로도 유명하다.  동화작가 그림형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풀다강 줄기 헤센주 주립공원 칼사우에(Staatspark Karlsaue)와 꽃섬 지벤베르겐(Siebenbergen) 일대도 정감 가는 곳이다. 1710년 백조섬이 있는 대분지를 발굴하며 조성했다는데, 몇 개의 작은 인공 섬과 정원이 어우러져 있다. 수련 연못으로 둘러싸인 작은 산에 봄에는 수선화, 튤립, 히아신스, 진달래까지 3층으로 피어난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 색깔, 꽃, 물오리 등의 전망으로 독특한 경관을 누릴 수 있다. 관상 및 수많은 침엽수와 자생 야생 식물, 수련 및 난초가 결합되어 식물원 분위기다. 가까운 위치에 오랑제리(Orangerie) 궁전도 있다.

‘빌헬름스회에(Bergpark Wilhelmshöhe)’는 유럽 최대의 산상공원(Mountain Park)이다. 
공원의 가장 높은 지점은 526m 높이의 Karlsberg 산. 거대한 헤라클레스(Hercules; 사진)상이 올려져 있는 이 주변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까마득히 높이 올려진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긴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와 물길(steinhöfer wasserfall; water display;  물을 이용한 정원 시설)는 17세기 후반부터 헤센-카셀(Hessen-Kassel)의 카를(Carl) 영주의 지시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150여년동안 계속 늘렸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상 뒤편에 있는 수조와 장치(水空裝置)를 이용한 복합 시스템으로, 거대한 바로크 양식의 워터시어터(물 극장), 동굴, 분수, 그리고 350m 길이의 폭포같은 물길(Cascade), 간헐천과 같이 50m 높이까지 솟아오르는 대분수(Grand Fountain)에 물을 공급한다. 절대주의 군주의 이상과 함께 바로크와 낭만주의 시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트램 1번을 타고 공원 입구에 내린 다음 버스로 갈아 타고 정상으로 가면 편한데, 구글맵의 대중교통 안내 기능이 카셀에서는 작동이 안된데다가 미리 공부도 안하고 갑자기 찾아가 시간을 낭비했다.

귀국하기 전에 꼭 한번 들렀다 가라는 친구의 청을 받아 프랑크푸르트로 가려던 코스를 바꿔 레버쿠젠으로 향했다. 바이엘(Bayer) 본사 소재지로 유명한 곳. 독일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쾰른과 라인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

바이엘이 회사 구내에 꾸며놓고 일반에게도 개방한 정원이 인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아담하게 꾸며진 일본식 정원은 황거 정원을 모델로 하여, 화학 공장지대로서의 레버쿠젠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시민들 산책 공간으로 기증한 것이란다(사진).
바이엘에서 20여년을 근무하며 레버쿠젠에 터를 이룬 친구 남편과 '운명'을 주제로 한참 얘기를 나눴다. 일자리가 많지 않던 한국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독일 광산에 들어와 간호사 근무하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기까지의 스토리다. 모래가마니를 메고 운동장 한바퀴를 돌아보여야 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친구 둘은 낙방했고 혼자 합격했단다. 힘을 써서 어깨 위로 올리려던 가마니가 움직이지 않아 낙방이구나 절망하던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오른쪽 무릎으로 밑을 쳐올려 가슴 위에서 두 팔로 껴안고 뛰었다고... 귀국이 몇 달남은 시점에 우연한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그는 용기를 내 프로포즈를 하고... 우여곡절 끝에 독일에서 취업을 해보라는 격려에 힘입어 바이엘에 입사, 결혼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독일인 사위는 검사, 며느리는 IT업종 회사원....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이 운명을 바꿨다고 회상했다. 나는 그 말씀을 정정해드렸다. 그보다 전에 오른쪽 무릎치기가 일찌감치 운명을 결정했다고...

짧게 머문 레버쿠젠에서 뜻밖의 행운으로 사진 하나 건졌다.
작은 도시인데 지명이 낯익다 싶었더니... 1904년에 만들어진, 우리 축구의 두 거물 차범근 손홍민 선수가 소속됐던 레버쿠젠 홈구장을 만났다. 못하는 영어로, "나 한국에서 왔다. 안에 1분만 좀 들어가 보고싶다" 했더니 들여보내주고 사진까지 찍어 주는 젊은 직원... 차범근 손홍민 선수 덕분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맙다.

2023-03-14

카트만두 코판수도원의 명상프로그램과 동자승들... 그리고 개?…

네팔 여행중 편하게 자연 풍경을 즐길만한 가시거리가 안나와 부랴부랴 일정을 바꿔 카트만두에 있는 코판수도원(Kopan Monastery; Ward 11, Budhanilkantha)을 찾아갔다.
티벳불교 명상을 배우기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인기 있는 곳이라는게 예비지식의 전부. 

내가 머물던 카트만두 시내 타멜지역에서 약 7km. 2시간이면 충분하겠네 하고 길구경 삼아 걸어보려다 중도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결론적으로 잘한 선택.
울틍불퉁한 길, 높은 야산 꼭대기... 리셉션 팻말이 있길래 더듬거리는 영어로 혹시 하루짜리 프로그램이 있느냐 물었더니 안내 스님이 아주 중후한 목소리로 아직은 없고 열흘짜리 프로그램만 있다신다. 자세한 건 안내책자와 홈페이지 참조하라며 팜플렛 하나를 주신다.

한바퀴 돌며 구석구석 촬영을 하는데 매우 어린 동자승들을 유난히 많이 만났다. 아주 귀엽게(?) 포즈도 취해준다.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와 승려가 되는데, 현지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과목의 정규 교육도 받는다고 한다.

인상 깊었던 것들 간추려본다
ㅇ우리나라와 달리 동자승 많다. 앞으로의 문제가 걱정 없을 듯?
ㅇ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기념품점 등에서 편안하게 상업활동을 하신다.
ㅇ질문 답변 과정에서 뭔가 훈련되신 듯, 나직하고 중후한 음색...
ㅇ외부인 들어오는 시간 상당히 엄격히 통제한다.
ㅇ영어 설명 및 안내판이 참 많다.
ㅇ다들 영어를 잘하신다.
ㅇ네팔 어디나 그렇듯이 개들이 여기저기 참 많이 돌아다닌다. 등등... 

코판스도원 홈페이지 링크

<a href="http://www.kopanmonastery.com" rel="noopener" target="_blank">kopanmonastery.com</a>




2022-12-20

용산 이태원, 한남동 일대는 과연 명당인가?

삼성가에 운영하는 리움미술관~하얏트호텔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재벌가들의 주택이 모여있다. 삼성그룹 고 이건희회장, 누나 이숙희씨(구자학 아워홈 회장 부인),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그 아들 정용진 부회장, LG그룹 고 구본무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회장, 동부그룹 김준기 전 회장, SK그룹 최태원회장 등이 거주했거나 하고 있다.

장동건, 홍석천, 태진아, 이효리, 신민아, 조인성, 유연석. 싸이, 황정음, 유아인, 박명수, 송중기 등등 연예인들도 투자한 부동산이 즐비하다. 어떤 안목으로 골랐을까?

남산과 한강 사이, 풍수지리 용어로 가장 많이 알려진 배산임수(背山臨水)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단치 않던 폭우에도 물바다가 된 강남역 일대에 비하면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성북동과 함께 강북의 명당임에 틀림없는가?

일부 풍수가들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가 강원도 백운산, 경기도 천보산, 불곡산, 도봉산, 삼각산을 거쳐 한남동의 주산(主山)인 남산으로 이어져, 신령한 거북이가 뭍에 올라와 알을 낳고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듯한 영구음수(靈龜飮水) 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한 번에 4~50개의 알을 낳고 장수하는 거북이 중에서도 특히 목과 어깨사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견정(肩井)과 꼬리나 생식기 인근의 알을 낳는 부분이 명당의 혈로 지목된다. 남산이 몸뚱이, 이슬람사원 인근이 머리, 리움미술관과 그 주변의 삼성가 부근이 견정 부위에 해당하며, 멀리 명동 일대는 꼬리 부분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또다른 쪽은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백 년 전은 어떠했을까? 조선 중기부터 1920년대까지 이태원 일대에는 꽤 넓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살아 나오지 못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도 이 지역에 매장됐다가 흔적 없이 이장됐다고 한다. ‘유관순길’이란 명칭의 골목길이 생기고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 한 쪽에 추모비가 세워진 배경이다.
2020년 한 재벌가의 저택을 개축하려 터파기를 하다가 관(棺)도 없는 ‘흙구덩이 무덤(土壙墓)’이 쏟아져 나와 61기의 시신이 수습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위 두 곳의 위치로 미루어 보건대, 이태원역 동북~동남쪽 일대에 걸쳐 제법 넓게 묘지들이 산재해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뿐 아니라, 1924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봐도 공동묘지 표시가 제법 넓게 인쇄돼 있다. [참조: 조선교통지도(1924,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태원과 연결되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쪽에 대한 일부 풍수가들의 견해는 어떨까?
남산은 누에와 닮았고 그 아래쪽 매봉산 산세가 뽕잎에 해당한다는 견해가 있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다? 그 뜻의 한자 단어가 ‘잠식(蠶食)’이다.
그러나 걱정말자. 풍수든 사주든 사람의 길흉을 논하지만, 결국은 당사자의 선택에 따라간다. 선택에 따른 결정성을 가리켜 고차원의 세계에서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하우선생이 주역을 다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2-10-15

[스토리명상] 경복궁 서쪽 효자로 주변

서울 중로구 효자로(孝子路)는 경복궁 서쪽 담과 붙어 광화문 쪽에서 청와대 옆까지 남북으로 난 1.3km 정도의 길이다.
1960년대에는 전차가 다녔다. 청와대에서 원효로 성심여고에 다니던 당시 대통령 딸 박근혜도 더러 이 전차를 탔다.
효자로에서 서쪽 인왕산까지 조선시대 왕궁이 지척인 이 일대에는 숱한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다. 그 속에 스며있는 스토리를 찾아보고 곰새기다 보면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모든게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와, 나는 누구인가 무아(無我)를 사색하며 거닐 수 있다. 그 끝쯤에는 당연히 창의적 발상이 이어진다.
ㅇ 세종 태어나신 곳
태조 6년(1397년) 음력 4월10일 한양 북부 준수방 잠저에서 이성계의 손자 '이도'가 이방원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세종실록). 지금의 통인동, 옥인동 일대에 해당한다.
세종 탄신 614주년이 되던 2011년 양력 5월 15일을 기해 무심코 '서촌'이라 부른 이 지역을, 뜻있는 주민들과 종로구는 세종대왕 탄생지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자 '세종마을'이라 명명하고 선포식까지 가졌다.
ㅇ 창의궁 터 (통의동 35 일대)
1694년 숙종이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혼인시킨 후 1707년 사준 집이 창의궁이 되었다. 조선 21대왕 영조의 잠저가 됐던 것이다. 숙빈 최씨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진종)와 화순옹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ㅇ 백송 터(월성위궁 터; 秋史 金正喜 집터; 통의동 35-15 일대)
열개의 벼루 구멍을 뚫고, 쓰다 뭉갠 붓이 천자루가 넘는다는 19세기 최고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 ‘월성위’라는 작호를 받고지금의 통의동 백송터에 큰 저택을 지어 살았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도 세상을 떠나자 월성위궁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추사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백송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앞 마당에 심었다는데, 이 백송나무가 1990년 7월 낙뢰로 쓰러졌다.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을 구해 심은 인근 할머니의 스토리가 더해져 지금의 백송터로 자리매김했다.
ㅇ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1930년대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예술가들이 서울에서 자리잡기 전에 장기 투숙하며 문학의 열꽃을 피웠던 곳이다.
서정주, 김동리, 이상, 윤동주, 이중섭 등 문인 화가들이 포함돼 있다. 서정주, 오장환 등이 주도하며 1936년 연말 두달간 간행됐던 동인지‘시인부락’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2006년 문을 닫았는데, 역사적가치 덕분에 헐리지는 않지만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수시로 용도가 변하고 있다.
ㅇ 진명여학교 터
고종 42년(1905)에 엄준원이 달성위궁에 사숙을 설치했다가, 이듬해(1906) 4월 누나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로부터 토지와 재물을 기부받아 진명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엄비'라 칭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친왕)의 어머니이며, 양정고, 숙영여대 등의 모태가 되는 양정의숙, 명신여학교 등도 세운 분이다.
진명여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ㅇ 쌍홍문 터
임진왜란 때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가족들과 떠난 강화도로 피난길. 그의 모친을 욕보이려던 왜적을 저지하다가 장남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지고, 작은아들 희철이 모친을 산속으로 피신시켰으나, 싸우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림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주변에서 이들의 효행을 칭송하고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조원의 본가(효자동 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효자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ㅇ 신익희 가옥
제헌국회 부의장,국회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신익희(1894~1956)가 1955년 전후 약 2년간 거주한 곳이다. 목판, 고서, 친필 휘호 등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ㅇ 이광수(春圓 李光洙) 집터(효자동 175-1)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이광수는 11세 때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천도교에서 잔일을 했다고 한다. 1910년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1917년에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8년 부인과 이혼하고 폐결핵을 치료해주던 여의사 허영숙과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논설을 많이 썼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사 객원 논설위원, 1932년에는 '흙'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다수 발표,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던 허영숙과 함께 효자동 175번지에 살기도 했었다.
ㅇ 육상궁, 칠궁(毓祥宮; 七宮)
조선시대 왕을 낳은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된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된 진종의 생모), 영빈 이씨(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의 생모) 등이다.
처음엔 숙빈묘(淑嬪廟,훗날 毓祥廟로 개칭) 하나였으나, 1753년(영조 29)에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다.
당시 궁호(宮號)는 원칙적으로 세자나 세자빈의 사당에 붙였는데, 영조대에 이르러 사친(私親)의 사당에도 궁호를 사용하였다.
1908년(순종2)에 다른 사당들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궁이 되었다.
앙숙으로 유명한 숙종의 두 후궁, 영조의 두 후궁의 사당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뭔가 께름칙하다.
영조는 즉위 2년을 조금 넘긴 뒤부터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을 다녀 오는길에 여러 승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저였던 창의궁에 들르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처럼 궁궐 밖에서 태어 났지만 결국 왕이 된 인물들의 잠저들을 두루 방문했으며, 52년 간의 재위기간중 육상궁에 247회나 참배했다 한다.
ㅇ 그밖에
이름없는 골목 속에 가꾸어진 '수상한' 화단, 김재규가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쏜 궁정동 안가... 숱한 근현대사가 얼키고 설킨 공간에서 우리는....

2022-08-31

구경거리 많던 추억 속의 ‘갱갱이’

매년 여름 끝에 열리는 '강경문화재 夜行' 행사에 맞춰 나온 작은 책자. 표지와 권선옥 논산문화원장의 책머리글.

구경거리 많던 추억 속의 ‘갱갱이’

김 백 순

거창하게 역사나 문화로 포장하기는 멋쩍고 선명한 기억도 아니지만, 어렴풋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많을 것이다. 선악이나 진위의 분명한 구분은 날 선 긴장을 부르지만, 아리송하고 희끄무레한 감성은 전설이나 신화처럼 자유로운 공상이 보태질 여유가 있어 좋다.

나의 경우 갓난아이적엔 아버지 근무지였던 대전에서 컸다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저 강경에 살며 ‘백합유치원’을 거쳐 중앙’국민’학교, 강경중학교까지 다닌 것으로 새겨져 있다. 십대 중반에 고교 진학을 위해 상경한 뒤 십여 년간 서울 대전을 떠돌면서도 강경은 어른들이 계신 곳이라 언제든 거리낌없이 기댈 자리였다. 다른 지역 친구들은 ‘시골 강경’에 유치원이 있었고 내가 다녔다는 얘기를 들으면 대뜸, “그 시절 유치원? 잘 살았구먼”하는 반응을 보이며 놀라워했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온 동기생 마을에 합격 축하 현수막까지 붙었다지만, 강경중학교 출신으로서는 ‘서운하게도’ 그리 큰 경사는 아니었다. 강경은 나름대로 도회지였던 것이다.

1950~60년대 강경의 동네 이름은 지금의 ‘리’가 아니라 ‘동’,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논산경찰서가 아니라 강경경찰서, 법원 검찰도 논산지원이나 지청이 아니라 강경지원과 강경지청이었다. 한전지사도 있었고 읍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없었다. 한참 뒤인 1970년대 얘기지만, 지금 대전광역시에 속하는 흑석리 친구 집에 전깃불이 안 들어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웠었다.

지역경제가 좋았던 덕인지 우체국 말고도 은행이 두 개나 있었다. 오일장이 서는 4일과 9일이면 아랫장터 윗장터 대흥시장 등등에 우마차를 끌고 온 마소와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 자동차가 온 거리를 가득 메울 만큼 생기가 돌았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서도 강경은 이미 조선사대에도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번잡한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도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화교학교가 강경에 있을 만큼 중국인들도 많아, 다양한 가게를 운영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도 강경에서는 별도의 타운이나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섞여 살았다. 내 또래 여자아이가 살던 앞집 중국인 부부는 자주 중국말로 소리지르며 큰 싸움을 했는데, 남편이 도망쳐 나오고 덩치 큰 아내가 마구 쫓던 모습도 동네 구경거리였다.

내 또래의 꼬마들에게 강경은 특히 구경거리가 차고 넘쳤다. 약장사가 소개하는 진기명기, 건어물상에 쌓인 멸치를 집어 맛만 보는 공짜 손들, 소나 말이 똥이나 오줌을 싸는 모습, 서커스가 들어왔다고 알리는 행진과 풍악소리, 내용은 잊었지만 이따금 허공에 날려지는 대국민 홍보 내용이 적힌 삐라, 지나가는 트럭의 휘발유 냄새를 맡으면 회충이 떨어진다며 뒤쫓는 애들…

내가 다니던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엔 학부모가 아닌 어른들도 잔뜩 모일 때가 있었다. 정기적으론 운동회 날이 그랬다. 국회의원이니 뭐니 하는 선거유세도 있었고 한밤중 무슨 문화영화 필름도 돌려 온 동네가 북적댔던 기억도 있다.

60년대초의 어느 날인가, 갑자기 ‘잠자리 비행기’ 한대가 빙빙 돌며 엄청난 굉음으로 강경 하늘을 덮었다. 나도 친구들도 동네 어른들도 그 헬리콥터가 내리는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프로펠러에 날린 운동장 모래알들이 얼굴을 때리던 따가움이 지금도 느껴진다. 왜 갑자기 헬기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강경을 지나 군산으로 가던 미군 차량이 학교근처를 지나던 어린이를 치었는데, 이를 응급후송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좋은 일이던 궂은 일이던 당시엔 이런 모든 게 ‘구경거리’였다. 미군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헬로 초콜렛 기브 미”를 외쳐댔던, 지금 생각하면 창피스러운 행동도 예사로운 ‘장난’이었다.

개교한 지 120년이 가까워지는 이 중앙초등학교가 학생수 부족으로 최근 폐교까지 거론된다지만, 1924년 일제강점 당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선생님 한 분과 50여명의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시절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사설로도 다루었다. 앞장섰던 김복희 선생님과 학생들 상당수가 내가 어릴 때 살던 홍교동 집 바로 코앞의 강경성결교회 신자여서, ‘최초 신사참배거부 기념비’가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강경의 분위기는 낯선 종교나 외세에 대해서 칸막이로 단절하기 보다는 유연하고 퍽 느슨했던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러하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성결교회 여름성경학교에 빠짐없이 다니며 목사님 전도사님의 귀염도 받았고 동방박사 역을 맡아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혼식은 천주교성당에서 혼배미사로 했으며, 항공사에 근무할 때는 국제선 기내지에 유명 사찰탐방기를 연재했고 명상공부를 하면서 많은 스님들과 정기적으로 불교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래서인지 조그만 지방도시임에도 종교나 교육 관련 스토리가 퍽 많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금강 황산포와 바로 연결된 나바위였다. 처음 사목하며 머물렀던 신자 구순오의 집은 내가 살던 곳에서 100미터쯤 되는 거리다.

한국침례교회의 첫 예배지는 어딘가? 인천에서 강경으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 자택이다. 미국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부부 등 다섯명이 1896년 2월 9일(일) 첫 주일예배를 드려, 기독교 한국침례회가 태동한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사한 황산리 금강변에는,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우리 예학의 우두머리[宗匠]라 일컬어지는 사계(沙溪 金長生) 선생과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문화유적들이 모여 있다. 황산벌의 평야지대 한 켠 바로 옆 굽이쳐 흐르는 금강과 더불어 툭 터진 전망이다. 광산 김씨 내 선조이셔서 남달리 관심을 가졌던 사계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하던 임리정(臨履亭)이 중심이다. 1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팔괘정(八卦亭)은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스승 곁에서 당대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장소다. 명당 터를 소개한 유명한 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이 책 서문을 우암의 강경 집에서 썼다고 한다. 인근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은 선현들에 대한 봉사(奉祀)와 후진을 키워내는 교육 기능을 겸했다.

얼마 전 금강을 따라 임리정 앞 뚝방길을 걷다가 강경읍과 부여 세도면을 잇는 황산대교를 보며, 중학생 시절 나룻배를 타고 등하교 하던 강 건너 친구들이 생각났다. 장마철 물이 불어나면 그 친구들은 바지를 다 적시기도 했고 아예 등교도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친구들 강경에 편안한 집이 있는 내가 부끄러울 만큼 참 모범생들이었다.

문득 중학교 졸업 무렵 이 황산리 어디쯤에서 ‘치른’ 난생 처음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반백 년 훨씬 넘는 지금까지도 설레지는 ‘떨림’. 서울행 유학 시험을 마치고 강경중학교 졸업하러 다니러 왔을 때, 두어 달이나 못 보다 만난 후배 여자애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겁결에 부둥켜 안다가 그리 됐다. 단정적으로 고백하건대 그건 고향이 주는 ‘순수한 자신감’이 가져다 준 ‘보상’이자 엄청난 ‘황홀’이었다.

세월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을 엮어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다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 강경에 대한, 강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인들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만든  ‘어느날 강경에서’ 목차

2021-12-06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품은 남산예장공원

 남산 북쪽 예장공원 자리는 조선시대에 군사들의 무예훈련장(藝場)이 있었다고 한다.

1906년 일제 침략이 시작되면서는 이 자리에 조선 침략을 지휘하는 ‘통감부’와 ‘통감관저’가 들어서, 마침내 1910년 8월 통감부 청사에서 데리우치와 이완용이 양국의 전권위원 자격으로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강제 병합조약에 서명을 했다. 이 기막힌 국가적 치욕 사건이 '경술국치'다. (사진)
1960~70년대 박장희대통령 시절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중앙정보부’와 정보부장 공관이 자리잡았다. (사진)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들을 고스란히 품은 이 터가 2021년 6월 공원으로 돌아왔다.
‘중앙정보부 6국’(서울시청 남산별관)과 'TBS교통방송'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 서울광장의 2배 규모에 수목이 우거진 지상 공원과 쓸모있는 지하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이회영 기념관, 중정 고문실을 재현한 '기억6', 총독부 관사 터를 살린 '유구터'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근처의 통감관저터, 남산 중정터 및 중앙정보부장 관저터 등에는 표지석을 세워놨고 위안부 기억의 터도 마련돼돼 있다.

2021-11-09

[PhotoPoem] 해맞이 갈매기 / 하우 김백순

해맞이 갈매기 / 하우 김백순

밤비 내리니 새벽이 서늘하더구먼
호미곶 동쪽 바다 해맞이
먹구름 가득한 하늘 그 틈새 어디로
혹시 예사롭지 않은 빛이 스며들까
손바닥이라도 바라보며 기다렸지
틀렸구나 포기할 즈음
갈매기 갈매기
하나 둘 셋 넷
손가락 끝에 앉다 다시 날고
하나만 더.... 기다려도 오지 않던
그 하나가 마침내 채워질 때
난 부르르
몸을 떨었지
다섯 갈매기가 다독인 내 욕심
그들을 보는 나를 즐기는 그들

 [용사21 4회 사진전 출품제목:생존법칙3 / 호미곶 갈매기]



                 




2021-08-17

먹구름 틈새로 '눈물 속에 피는 꽃'

8월 17일  소나기가 예보된 날. 2021년 가을 두번째 사진전시회를 준비하는 '용사 21' 멤버들과 함께 용유도~무의도에 다녀왔다. 

무의대교 위에서 마시안 해변쪽 검은 갯벌 위로 먹구름 가득. 금방이라도 사납게 쏟아질 듯한 그 틈새로 노을이 믈든 하늘빛... 갑자기 '눈물 속에 피는 꽃'이란 생각이 꽂혔다. 오래된 노래 제목 아닌가?

(왼쪽 사진은 저녁 7시쯤 비 쏟아지기 5분전 풍경이다. 뽀샵을 좀 했으니 딱 이 사진 색상은 아니다.

아래 사진은 뽀샵 연습을 위해 두물머리에 있는 외로운 나무를 옮겨오고 제목까지 붙여 낯 두껍게 전시회에까지 내보냈던 습작이다.)

원제 'L'immensita'는 광대함, 가없이 무한하다는 뜻이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새로운 꽃도 피우고 나비도 난다..... 드넓은 세상에서 어떤 이는 나를 생각도 않지만, 누군가는 나를 잊지 않고 있겠지... 언젠간 내게도 다가올  사랑을 찾을 거야.....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가없는 세상 인생길에서 사소한 일로 번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명상적 뜻도 이 노래 가사는 담고 있다.
Don Backy Mogol 작사, Detto Mariano 작곡, 이탈리아 칸초네. 우리나라에서는 '눈물 속에 피는 꽃'으로 소개된 번안곡이다.
원곡은 1967년 Johnny Dorelli가. 국내에서는 오정선, 이선희 등 쟁쟁한 가수들이 소개했으며, 한경애는 번안된 한글로, 웅산은 원어로 불렀다.

웅산 https://youtu.be/QsvI0ir-laA

한경애 https://youtu.be/L7r8LKFqKvE ​

Johnny Dorelli https://youtu.be/fAv_ahvvQgo

2020-10-04

명동에 담긴 역사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명동은 여러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다방과 술집을 드나들던 문화예술인, 카도릭 성지, 백 여년 전부터 자리잡은 중국과 일본의 흔적, 관광객... 자료를 구하는 대로 틈틈이 보완하며 시대순으로 정리해본다.

K-Pop의 뿌리? 국립음악기관 '장악원(掌樂院)'
K-Pop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가무(歌舞) 전통은 꽤 유서가 깊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던 기록이 나오는 오래된 중국 문헌(진나라 시대 진수(陳壽)가 297년에 지은 "삼국지(三國志>魏志東夷傳)", 남송 시대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東夷傳)" 등)에 나오는 선사시대 우리나라 가무(歌舞) 문화는 제천의식을 통해 며칠간 음식을 차려놓고 남녀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행사를 벌였다.
부여 12월에 영고(迎鼓), 고구려 10월 동맹(東盟), 동예 10월 무천(舞天) 등이 그것이다.
마한에서는 5월에 파종한 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무리를 지어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10여 명이 서로 따라가면서 땅을 밟고 구부리고 펴는 동작의 손발이 잘 맞았다고 한다. 10월 농사일이 끝나고서도 이 같은 행사를 다시 하였다는데, 농경사회에 있던 전형적인 음악문화로 최근까지도 두레풍장굿이라는 농악(農樂)의 한 형태로 전승되었다.
주제를 벗어나니 이쯤에서 그만 시대를 건너뛰어 보자.
조선은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다. 따라서 음악을 통치 방편의 하나로 인식하고 별도로 음악 기관을 두고 왕실의 의례를 행하도록 했다. 조선 초 역할에 따라 다섯개로 나뉘어 있던 궁중음악 기관은 1457년(세조 3) 악학과 관습도감을 합하여 악학도감이라고 칭하였다. 향악과 아악으로 구분한 전악서와 아악서를 합하여 장악서라 칭하고, 이를 악학도감에 예속시켰다. 이 장악서가 나중에 장악원으로 개칭됐는데, 이 명칭은 1466년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나타난다고 한다. 국립음악기관이랄 수 있는 장악원 건물이 완공된 뒤 기록된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에는 우리 선조가 음악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단한(!) 표현이 나온다.
"사람으로서 음악을 모르면 기운을 펼 수 없고, 음악이 없으면 바른 나라의 이룰 수 없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한 엑스포인 콜럼버스 미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장악원 악사들이 파견됐다고 한다. 당시 기와집 8칸짜리 형태의 전시실을 설치했다는데, 조선의 음악이 중국과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좋은 수단이라는 미국 선교사 알렌의 충고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장악원 터 표석이 을지로쪽 명동입구 하나은행 앞에 놓여 있다. (사진)

‘어부사시사’, ‘오우가’ 지은 윤선도(孤山 尹善道) 집터
1587년 한양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8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전라도 해남에 내려갔다. 26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광해군, 인조 반정, 병자호란 등의 시기를 거치며, 귀양생활, 왕자의 스승, 의병 지휘자 등 부침을 거듭했다.
54세 때인 1640(인조 18)년에 다시 내려가 말년엔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보길도에서 학문 연구와 시 짓기에 몰두했다.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벗으로 삼은 ‘오우가’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린 시조로 유명하다.
한글 창제 백여 년이 지났지만 당시 풍조상 어른들 몰래 누나에게 배운 한글로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 75수가 전해진다. 1671년에 사망.
명동성당 맞은 편 NH농협 건물 앞에 윤선도 집터 표석이 놓여 있다. (사진)

18세기말 명례방 지역과 천주교
1784년(정조8) 청나라 사절(冬至使) 일행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薰)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귀국한 이승훈은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한 김범우(金範禹)의 명례방 집(장악원 터 부근)으로 집회 장소를 옮겨 성사를 집전하는 등 일종의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당시 바티칸의 정식 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사실상의 교회 역할을 하는 집회소를 세운 매우 특별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곳에서 집회를 열었던 이들을 '명례방 공동체'라고 하는데, 이듬해인 1785년 적발되어 집주인 김범우는 밀양으로 유배된 뒤 1년여 만에 형벌 여독으로 37살에 숨을 거뒀다. 천주교를 믿다 죽음을 당한 최초의 인물로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이다.

조선의 쇠락과 외세의 진입
조선말 서양식 훈련을 받은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가 충돌하면서 1882년(고종19) 군란(壬午軍亂)이 벌어졌다. 진압 명분으로 청나라에서 3천500명의 병사를 파견했는데, 그 일부가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주둔했다. 이때 함께 들어온 청나라의 조달상인(군속)들도 부근에 식당 등 각종 가게를 열었다. 188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이 주둔지에 공관을 짓고 10년 가까이 머물렀다. 청나라는 이 자리에 중화회관(상공회의소에 해당)과 상무공서(영사관에 해당)를 세웠고, 상권도 더 커지며 다양한 중국문화가 유입되었다.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한성조약이 체결되며 일본인들도 이 땅에 터를 잡아갔다. 1885년 조선정부는 현재의 명동성당과 백병원 사잇길 일대를 공식적으로 일본인 거주지로 지정했다. 그 무렵 백 명이 채 안됐던 일본거류민이 10년 뒤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 말에는 2천명으로 늘었다.
1896년 이후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섰고 후에 경성부청으로 바뀌었다가 1930년 미츠코시백화점이 개업했다.
러일전쟁시기인 1904년에는 일본인거류민의 수가 5천여명에 이르렀고, 1910년대 일제강점기의 명동(明治町)은 충무로(本町)와 남대문통 을지로(黃金町)와 더불어 상업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 상점 진출이 확산되며 귀금속, 의류, 식음료 등 다양한 상가가 들어섰다.
청나라 상무공서 건물도 1910년 이후 한때 일본인이 차지했지만, 1920년대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중국 소유로 바뀌었다. 광복 후에는 중화민국(타이완정부)이 건물을 지어 대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992년 한중수교 및 대만 단교에 따라 명동 부지는 중국 측으로 넘어갔다. 청-일본-대만-중국을 거치는 이 건물의 역사는 격동의 근대 동아시아사의 상징이다.

한옥 대저택 자리에 세워진 성당 앞에서 칼 휘두른 이재명
조선이 몰락의 길로 서서히 접어들며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 흥선대원군 사망 세달 뒤인 1898년 5월, 엄청났던 기독교 탄압이 끝났다는 듯, 수도 한복판에 그 상징인 천주교 건물이 우뚝 섰다. 처음 이름은 ‘종현성당’이었다.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이 소유했던 대저택 자리였다. 바깥채만도 60여 칸이나 되는 한옥을 1883년 프랑스 국적의 초대 주임신부 블랑 주교가 넘겨 받아, 거의 4년 동안 그대로 교회당으로 이용하다가, 현재와 같은 고딕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의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7년 이후였다.
명동성당의 하늘로 우뚝 솟은 본관 건물 밑 지하는 종교적인 관점으로는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앵베르(한국이름 范世亨) 주교를 비롯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는 1837년부터 전도활동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 당했다. 이분들을 포함 모두 5?분의 신부와 무명 순교자 2위 등의 유해가 함께 모셔져 있다.
사적 258호로 지정된 고딕식 건물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이었다고 한다.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09년 12월에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을 습격했던 의거도 있었다.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은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추도식을 마치고 인력거를 타고 나오던 이완용을 여러 차례 찌른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목숨은 건졌고, 이재명 의사는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되어 1910년 5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에는 이런 말이 담겨 있다.
“.....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했으며, 의거를 공모한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명당성당 입구에 ‘이재명의사 의거터’ 표지석이 놓여있다. (사진)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 6형제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인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1932) 선생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 1907년 4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하고 같은 해 6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함께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 서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10년 동안 3천500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에는 상해입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의열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1932년 일경에 검거되어 순국하고, 다른 형제들도 망명지에서 사망했는데,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시영(李始榮·1869~1953)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윤선도 집터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으로 추앙되는 독립운동가 집안 여섯 형제 집터 표석이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함께 놓여있다. (사진)

우리 자본시장의 시발점? '조선취인소'
1880년 유길준,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을 통해 처음으로 주식회사 제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자본을 모아 큰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제도 자체가 없었던 시대에 주식을 어떻게 모집하고 매매하는지 알렸으며, 1880년대 후반, 주식회사의 도입 이후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거래가 어느 정도 활발해지자 1920년 조선총독부는 '경성현물주식취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거래소 개설을 허가하였다.
우리 자본주의의 시발점이었던 명동의 조선취인소는 사라졌고 증권거래소의 명맥으로 공인되지도 않는다.

일제 침략기관에 폭탄 던진 나석주 열사
일제강점기에 금융회사로 진입해 우리 땅을 강탈하고 농민을 착취하는 역할을 맡았던 침략기관으로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의열단원으로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나석주는 1926년 12월 국내에 들어와 남대문통에 있던 식산은행에 폭탄 1개를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고, 동양척식회사를 습격, 직언들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폭탄 1개를 투척하였다.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포위되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 말고 분투하라”는 말을 남기도 자신의 가슴에 권총 3발을 쏴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은 장악원터 옆이다. 나석주의 동상과 함께 표지석도 놓여 있다. (사진)

1930년대의 클래식한 극장 건물
상업시설로 즐비한 명동거리의 한 복판에 예사롭지 않게 클래식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있다. 명동예술극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10월 ‘메이지좌(明治座)’라는 이름으로 개관, 일본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다. 미군정기인 1946년에 ‘국제극장’, 1948년에 ‘시공관’, 1957년에 명동예술회관, 1962년에 국립극장으로 개칭해왔지만 극장의 역할을 해왔다. 1973년 국립극장이 현재의 남산기슭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민간에 매각되어 1976년부터 10년간은 대신증권 간판이 걸렸었다. 2003년에 문화관광부가 다시 인수하여 2009년 6월부터 연극 전문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 외부 벽면은 1930년대의 옛 모습을 살려내고, 내부는 완전히 리모델링, 최신 무대시설을 갖춘 6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탄생했다.
1936년 개관 이래 근현대 문화예술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10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광복 전후 명동의 사랑방들
해방 직후 정부 수립까지의 혼돈기에도 차 한잔 시켜놓고 죽치던 나름대로의 ‘다방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11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와 재즈 - 다방은 안식처’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시내에만 다방이 100여곳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다방은 1927년 관훈동에 있던 ‘카카듀다방’으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이경손이 경영했다고 한다. 벽에 탈을 걸어 놓고 턱시도를 입은 이경손이 직접 차를 나르고 화가, 문인, 기자들이 모였는데, 몇 개월만에 운영난으로 폐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다방 손님이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았던 것은 경영주의 영향도 컸던 때문이기도 했다. 극작가이자 음악평론가였던 김관의 ‘에리사’ 등이 명동에 있었고, 소공동이나 종로 등에 있던 유치진, 배우 복혜숙의 다방도 유명했다. 1933년에 개업한 이상의 제비다방은 부인(금홍)이 운영했던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35년 문을 닫고 광교 부근에 개업하려던 ‘69다방’은 이름이 외설적이라는 진정이 들어와 허가가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여류문학가 손소희·전숙희·유부영씨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마돈나’의 분위기를 소설가 이호철이 ‘문단골 사람들’(1997)에 기록한 글을 인용해본다.
“… 좁다란 다방 한구석에서는 동리와 다방의 주인마담 손소희가 나란히 앉아 사랑이자 문학을 속삭이고, 또 한쪽 정지용과 모란의 시인 김영랑이 얼멍덜멍 앉아 있는 그 한켠에서는 이용악이 술에 취한 채 웅얼웅얼 자신의 시를 읊조린다.”
이렇게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만남의 공간 같은 사랑방 역할을 했다. 문인들의 집필실, 예술인들의 아이디어 공간, 때로는 전시장 역할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모나리자, 문예싸롱, 동방싸롱, 청동다방, 돌체 등을 꼽을 수 있다. 박인환이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모자란 술 값 대신 모나리자에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문예싸롱’은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 당시 문단을 주름잡던 문인들이 출입하던 다방으로 문단 추천, 원고청탁, 논쟁, 연애, 싸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유네스코회관 바로 앞에는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은성주점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사진).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나애심, 천상병, 김관식, 김수영..... 현재까지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누비던 공간이다.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는 거의 매일 이곳에서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6.25전쟁과 명동 그후- 통기타와 고고장
퇴계로쪽 명동 입구 밀리오레 건물 자리는 우리 해군과 인연이 깊다. 6·25 휴전 뒤인 1953년 8월 해군본부가 자리 잡았으며 그 이전 해군이 정식 발족하고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수원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도 본부로 사용됐던 장소로 추정되기 때문이다(최초의 해군본부는 영등포구 신길7동).
6.25 전쟁 때는 명동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 측에서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전해진다.
휴전후 현대식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1950~60년대 명동 곳곳의 다방들은 다시 문화, 예술인 출입으로 분위기를 쌓았다. 예술과 낭만거리라는 표현도 등장했고, 유흥, 오락, 의상, 양장점 등 패션가도 형성됐다.
오비스캐빈은 1969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통기타 살롱으로써 조영남을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트윈 폴리오와 양희은이 활동했던 무대였다. 그리고 이곳 주변으로 여러 고고장들이 있었다.

세계 최대의 호텔 사고- 대연각 화재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수십명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도 총 사망자 166명 중에는 뛰어내리다 추락사한 경우도 38명이나 되었으며, 실종자도 25명이나 되었다. 서울시내의 소방차들이 거의 다 출동했고 육군 공군 미군 헬기까지 지원했지만, 강한 바람과 당시로서는 21층이나 되는 고층이어서 쉽게 진압하지 못해 인명을 구조하기 어려웠다. 당시 국내 최고의 32m 사다리차도 7층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대형건물에 스프링클러 화재진압시스템 설치, 고층건물 옥상 헬리콥터 이·착륙장 확보가 법률로 의무화되어 시행되었다.
MBC-TV가 화재 현장에서 전국에 생중계해 주목을 받았는데, 생중계 방송이 처음 시작된 사건이라고 한다.

2020-01-31

교토 오사카 고베 5일

 [교토]

ㅇ기요미즈데라(청수사)
199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원, 산 허리에 돌출된 무대(veranda)는 국보.
봄에는 활짝 핀 벚꽃,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장관. 킨카쿠지(금각사) 및 아라시야마와 함께 교토의 상징적인 유적지.
ㅇ산넨자카 니넨자카
돌로 덮인 계단으로 된 두 개의 오르막으로, 신넨자카는 기요미즈자카와 니넨자카를 잇는 작은 골목. 대부분 에도 시대에 지어진 마치야 양식의 목조 주택에서 기요미즈 그릇과 교토의 오래된 자기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많다.
ㅇ 아라시야마
많은 시의 주제, 꽃, 단풍, 도게츠교(캇수라강을 가로지르는 155m 길이의 다리, 걷다보면 아라시야마), 덴류지, 치쿠린(대나무숲)의 아름다운 경치, 란덴열차 이용.
사가노 토롯코 열차(Sagano Scenic Railway)는 아라시야마에서 운영되는 관광 철도. 호주교(Hozukyo) 협곡을 따라 숲을 통과하며 장엄한 풍경 감상.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153649&memberNo=35969&vType=VERTICAL
ㅇ후시미이나리 신사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중 하나. 수확 및 상업적 성공을 관장하는 신, 이나리 오카미 숭배
주요 사당으로 통하는 토리이(Torii)는 이 신사의 유명한 풍경- 길고 끝없는 길은 산기슭에서 산꼭대기까지 뻗어 있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
ㅇ 산젠인(이끼정원), 호센인(액자정원)- 오하라 지역, 명상 분위기 절.
ㅇ 은각사(긴카쿠지; 지쇼지)에서 난젠지 근처까지 이어지는 길은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 교토의 철학자였던 니시다 키타로가 이 길을 오가면서 사색을 하던 “사색의 작은 길”이 “철학의 길”로.. 1972년에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 이 길의 이름으로 삼게 되었고, 일본의 길 100선중에 하나로 실릴 정도로 명소가 되었다.
ㅇ킨카쿠지(금각사)
1397년에 완공, 원래 아시카가 요시미쓰 장군의 주택으로 사용되던 곳, 나중에 선종 사원으로 개조.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사슴 정원 사원"이라는 뜻)였으며, 건물의 외관을 감싸고 있는 금박 덕분에 금각사라고도 알려져 있다. 국가 보물로 지정.
ㅇ 기온거리(하나미코지도리- “꽃을 볼 수 있는 작은 길”=게이샤)- 고급 요리 식당과 요정 등 많아 아직도 게이샤를 만날 수 있다. 종업원들도 기모노를 입고… 게이샤가 되기 위해 준비중인 마이코들도 볼 수 있다.
밤이면 쿄토 제일의 유흥가로 변신하는 곳
ㅇ니조죠(Nijo Castle)
한때 도쿠가와 쇼군이 교토에 있는 동안 거주, 높은 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내부의 방은 유명한 "나이팅게일 바닥"이 설치된 복도로 연결 (밤에 암살자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위에서 걸으면 새 울음 소리가 나도록 설계).
ㅇ가모강
교토의 중심부 관통, 강둑에서 포옹하는 연인의 모습, 얕은 강에서 놀며 먹이를 잡는 물새들의 모습, 강 양편에 벚나무, 백로, 강가에 자리한 레스토랑.
ㅇ가와라마치(교토 번화가) 거리 지나 전철 타고 오사카….
ㅇ교토 타워
양초 모양으로 디자인, 교토의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사방으로 펼쳐진 신사와 사원, 히가시야마 산의 전경 감상. 전망대 외에도 레스토랑, 온천 및 호텔.
ㅇ교토고쇼
본래 일본 왕실의 공식 왕궁, 지금도 천황의 교토 거주지로 사용. 일본 전통 양식 시신덴은 교토고쇼의 본궁.

[오사카]
ㅇ오사카성 주변 공원
나고야 성, 구마모토 성과 함께 일본 역사상 유명한 3대 성, 웅장한 성문과 가파른 벽, 성을 둘러싸고 있는 큰 호수가 인상 깊은 곳. 1583년에 건립되었으며 "히데요시 성"이라고도 알려진 천수각(덴슈카쿠)을 중심으로 둘러싼 큰 규모의 공원에는 푸른 숲과 운동시설, 야외 음악 광장, 봄에는 벚꽃과 매화.ㅇ 시립 주택박물관-에도시대 등 오사카 건물역사를 재현해 놓은 곳
ㅇ 구로몬시장(黒門市場)-오사카의 부엌이라 불리는 재래시장. 1800년대부터 생선 시장…
ㅇ 시텐노지(四天王寺)-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코 천황 원년(593년)에 세워졌다는 절
ㅇ 아베노하루카스- 300 전망대- 멋진 전망과 야경- 우메다 공중정원보다 잘보임..
ㅇ 신사이바시스지(心斎橋筋)- 유명한 고급백화점 다이마루 등 입점한 스트리트형 상가
오사카 쇼핑하면 바로 이 지역일 정도, 오코노미야키, 꼬치구이, 다코야키, 일본 라면은 물론, 전 세계 다양한 음식이 가득한 맛집도.
ㅇ 도톤보리-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신사이바시와 달리 서민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번화가. 화려한 네온사인과 독특한 간판… 특히 에비스바시의 글리코제과점 옥외 간판이 트레이드마크. 에비스바시는 젊은이들의 난파(なんぱ;거리에서 처음 본 여성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행동)로 유명하여 ‘난파다리’라고도 불린다. 난파를 당하지 않고 이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젊은 여성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는 난파가 성행. 다코야키[たこやき]집, 회전초밥집, 긴류라면(금룡라면) 같은 음식점…
ㅇ하늘로 통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츠텐카쿠
오사카가 배경인 만화에 꼭 한 번씩은 등장할 정도. 야경으로 유명, 주변에는 유명 일본식 꼬치구이 맛집들.
ㅇ구로몬 시장
오사카의 부엌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지인들이 과일과 채소를 사는 장소. 복어 레스토랑, 해산물, 고베 소고기를 선보이는 고급 레스토랑까지...
ㅇ시텐노지 절
붉은 기둥과 흰 벽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은 중국 북부 및 남부에서 유래한 종교적 특성. 그러면서도 아스카 시대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은은히 빛난다. 사원 밖을 장식하는 독특한 석조물은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것. 사원 한복판에 놓인 거북이 연못 한가운데 돌계단,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제물 올리고 춤을 추던 곳.
ㅇ 저녁식사 (오사카 3대 명물 오코노미야끼(부침개) / 타코야키(문어) / 카니도라쿠(게) 중에서 결정)

[고베]
ㅇ기타노이진칸 산책(개항때부터 외국인타운)
ㅇ난킨마치(차이나타운)
ㅇ하버랜드, Meriken Park, 포트타워, 곡선미 아름다운 해양박물관이 어우러진 고베의 빛나는 밤.

2019-11-11

[인도 7] 델리 수도권의 관광지들

 인도 북부의 대도시 델리(Delhi, 힌디어) 수도권은 뉴델리와 올드델리로 나눌 수 있다. 영국의 설계와 건설에 의한 신도시 부분인 뉴델리가 수도이고, 예부터 마을이 있던 도시를 올드 델리라고 부른다. 델리를 중심으로 한 광역 수도권에 약 1억6천만 명이 살고 있다.


아열대성 기후 지역이지만, 여름과 겨울간의 기온과 강수량 편차가 크다. 사막 기후의 특징인 모래폭풍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아열대 기후와 차이가 난다.


델리의 여름인 5월 평균 기온은 섭씨 32도에 이르며 45도까지 치솟기도 한다.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계속되는 몬순때의 평균 강수량은 거의 8백mm에 달한다.


델리 시내


겨울은 11월에 시작하여 1월에 절정인데, 1월 평균 기온은 12~13도로 온화한 편이지만, 때때로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냉기류 영향을 받아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겨울철의 짙은 안개가 교통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복잡한 교통, 버스와 릭샤가 끊임 없이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로 정신 없지만 그나마 지하철이 있어 다행이다. 보수적인 인도에서 노출이 심한 옷이나 음주는 삼가하는게 좋다.


가볼 곳 간추려 보기


레드포트(Red Fort; 붉은 요새)


Red Fort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15만 평에 달하는 규모에 성벽 속 여러 궁전과 사원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올드 델리의 대표적인 명소다.


바하이 사원(Baha’i House of Worship)

꽃봉오리가 살짝 열린 모습의 거대한 대리석 연꽃 모양으로 건축되어 있어 연꽃 사원으로도 불린다. 사원에 들어 가서는 말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은 금지다. 바하이교는 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여행객 저마다 기도할 수 있다.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이 아름답다.


로디가든(Lodi Garden)

마지막 술탄 왕조의 무덤 일대.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양의 식물 조경 감상과 여유로운 산책이 가능하다. 1차 대전 참전 용사를 기념하는 인디아 게이트와 가깝다.


꾸뜹 미나르(Qutub Minar)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가 세운 승전 기념탑으로, 5층 탑이라지만 높이가 72.5미터에 달한다. 아파트 25층 높이의 거대한 탑에 조각된 힌두 양식과 이슬람 양식 문양의 코란으로 유명하다.


딜리 하트(Dilli Haat)

캐시미어 스카프와 그림, 목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이 있는 전통시장. 외국인은 50루피를 내고  입장해야 한다.


[이 인도이야기는 잡지 "큰그릇"에 필자 실명(김백순)으로 집필 연재하는 '스토리가 있는 여행' 기사와 일부 내용을 공유합니다.]

2019-06-26

[인도-6] 인도를 잘 아세요?

 여러가지 설이 있어 근거가 명확하진 않지만,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황옥이 인도 출신이라는 설화가 있다. 백제에선 침류왕 때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백제에 와서 불교를 전했다. 백제 승려 겸익(謙益)은 522년 우리 불교사상 최초로 불교 문화의 원류를 찾아 직접 인도를 다녀왔는데(526년), 신라 승려 혜초보다 200년 가량 앞선 것이다.

우리나라와 인도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신라 승려 혜초(彗超 704-787)는 723년 스무살 나이에 당시 천축국으로 알려진 인도여행을 나섰다.
길고 먼 험난한 여행 길….. 중국의 광주를 떠난 혜초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자바섬 앞바다를 경유하여 북인도의 구시나가라, 바라나시 등을 거쳐 파키스탄, 이란 등을 경유, 4년에 달하는 긴 여정을 거쳐 중국의 장안으로 돌아왔다.

성덕왕 26년(727)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세계적 여행기를 남긴다. 여행기는 1908년 중국 둔황(敦煌) 석굴에서 프랑스 학자 P.펠리오에게 발견돼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다.

1911년 영국왕 조지 5세가 델리 방문을 위해 바닷길을 통해 뭄바이 항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1924년 세워진 Gateway of India.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와는 다르다.

1919년 조선의 3.1운동이 인도 독립운동에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은 두 나라에서 있었던 여러 사실(史實)을 살펴보면 과장이다. 우리 국사교과서, 국가기록원에 기록되어 있는 ‘독립운동 판결문 3.1만세운동의 의의’, 심지어 대통령 연설문까지, "인도의 독립운동이 한국의 3.1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인용이나 자료참고 등으로 재탕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인도의 각종 시민운동 역사 연대기만 살펴봐도 팩트의 왜곡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1953년 6.25 한국전쟁의 휴전이 추진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용단으로 소위 ‘반공 포로’가 석방되었다. 이들 중 88명이 1954년 2월 인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80명이 재출국(70명은 중남미로, 10명은 북한, 중국으로…)하였다고 한다. 남은 분 8명도 나중에는 4명으로 줄며 인도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 사회의 1세대를 형성하였다.
1962년에는 뉴델리 총영사관이 개설되었고, 1973년 12월에 대사관으로 승격돼 오늘에 이른다.

‘인도에는 인도가 없다’?

질주하는 릭사의 소음, 극심한 대기오염, 불안한 치안 등을 보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드는 여행객들. ‘인도(印度)에는 인도(人道)가 없다’는 책까지 출판돼 있지만 우리는 인도를 제대로 알까?

믐바이 시내 빨래공장

인도 면적은 328만㎢으로 남한의 33배 정도다. 13억명이 넘는 인도의 인구 중에서, 힌두교가 82%, 이슬람교가 11%, 기독교가 4% 정도라 한다. “그 어떤 종교가 들어오든 간에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식으로 현지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세계에서 선교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라는 말이 있는 게 인도다. 섣불리 아는 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 "필자처럼" 여행지 몇 군데만 훑어보고 아는 체하는 용감성(?)을 드러낸다.
인도 여행에 관한 수많은 기행문이 발표되는 이유가 그 까닭일 듯하다. 넓다. 다양하다. 특이한 게 많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본 것을 써놓아도 조금은 새롭기 때문일 것이다.

선입견 내지는 첫 인상과 달리, 오늘날의 인도는 의회 구성 등에서 주목할 만한 민주주의 국가, 종교적 또는 정신적 차원에서의 수행과 명의, 제작편수와 관람인원 규모에서 세계 최대 영화 나라, 영국 식민지를 거치며 축적된 저변의 영어 능력,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국적 기업들이 세운 콜센터 등의 영향으로 발전한 IT산업 등에서 새롭게 눈 여겨 볼 만한 나라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2019-06-25

[인도-5] 무굴제국 멸망 후의 인도

 예나 지금이나 국가지도자의 좁은 시야와 사리분별 없는 아집은 나라를 어렵게 한다. 재정 형편 고려하지 않고 ‘폼 나는’ 건축에 몰두하던 샤 자한 황제는 아들에 의해 퇴위 당했다.
황제가 된 아들 아우랑제브(재위 1659~1707)는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기고,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허울뿐, 실제론 여전히 어수선했다.
악화된 재정, 종교적 갈등, 이슬람 세력 중심의 편향에 열 받은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의 반발이 겹쳤다. 1707년 90세의 아우랑제브가 후사 문제도 정리 못한 채 사망하자, 황위를 둘러싼 암투까지 겹쳐 제국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빅토리아 여왕과 인도제국

이러한 틈에 영국은 1757년 벵골-프랑스 연합군과의 전투 승리를 계기로 벵골지역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대륙 내의 번왕국(藩王國; 토호국 비슷한 개념)들을 하나하나 투항시키며 세력을 넓혀갔다. 그나마 19세기 전반까지 영국의 피보호국 무굴은, 명목상 다른 번왕국 윗자리로서 황제의 권위는 인정받았다.




이런 와중에 영국계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용병(Sepoy)들이 항쟁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이 ‘세포이의 항쟁’이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배후라는 이유로 폐위시켰다. 무굴제국이 330년만에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1857). 조선시대로 보면 철종 8년 때였다.
남인도, 스리랑카 및 현재의 미얀마 지역까지 병합한 영국은 1877년 인도제국을 성립시키고 영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837~1901)이 인도제국의 왕을 겸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지내다가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엉겁결에 왕이 된 철종 등극 과정, 대영제국에서 역시 직계에 후사가 없어 선왕의 여조카인 빅토리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사연, 어리고 가냘펐던 여성이 카리스마를 쌓으며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64년이나 이끌던 스토리 등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인도의 독립과 마하트마 간디

뜻하지 않게 1차세계대전(1914~1918)에 휩쓸린 영국은, 인도의 전쟁협력 대가로 ‘전쟁 후 자치 허용’을 약속했다. 이게 지켜지지 않자, 인도인들은 독립 쟁취를 위해 저항하였고 그 중심에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있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간디는 영국 유학- 변호사- 남아공 생활을 거쳐 인도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으며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인도는 우리보다 딱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 독립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 됐듯이 분리된 독립이었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 이슬람교의 파키스탄, 불교의 스리랑카로 나뉘었다가, 뒷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것이다.

뭄바이 '간디의 집' 서재에서 일행들과.....

독립 시점까지 종교 갈등을 빚고 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온 간디는 1948년 1월, 반(反)이슬람파 청년이 쏜 총탄에 희생되었다. 우리 나이로 80세 되던 해였다.

당시 간디가 살던 아담한 3층집에는 서재, 물레와 생활 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위대한 영혼’이란 뜻의 ‘마하트마’는, 1922년 간디를 방문한 타고르가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을 그의 자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 군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도망가는 장군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다.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 위대한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019-04-30

[인도-4] 무굴제국 황제들과 타지마할

북인도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면서 들어선 또 다른 이슬람왕조 ‘무굴제국(Mughal Empire)’을 세운이는 바부르(Bābur, 재위 1526~1531)이다. '무굴'은 곧 '몽골'을 의미한다. 바부르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 혈통 티무르(Tīmūr - 1336~1405)의 5대손 인 것이다.


우리 조선시대에 인도엔 무굴제국이 있었다


무굴 제국은 1556년 즉위한 3대황제 악바르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인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2대황제 후마윤(Humayun; 1508~1556)은, 궁전도서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남편 잃은 황후의 요청에 따라, 1562년에 짓기 시작해 1570년에 완성된 후마윤의 묘는 인도 최초의 정원식 무덤이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타지마할과 비슷하지만,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타지마할 보다 80여년 앞서 붉은 사암으로 지은 것이다.





대부분의 인도 관광지 외국인 입장료는 자국민 보다 훨씬 비싸다. 볼거리가 많은 무굴제국 시대의 유적이 특히 그러하다. 예를 들면 타지마할의 경우 인도인들 입장료는 250루피인데, 외국인은 1300루피(약 2만2000원)나 된다.


아내에 대한 사랑 또는 집착?- 타지마할


타지마할을 손끝으로 들다


무굴제국 5대황제 샤 자한(Shah Jahan; 재위 1592~1666) 당시 국력은 3대황제 악바르 이래 거의 절정기였다.

그의 문화적 취향과 종교적 관용성으로 시민들도 평온했다. 적어도 그의 황후 뭄타즈 마할(Mumtax Mahal; 1593~1631)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14세에 황후가 되어 19년 동안 14명의 자녀를 낳은 뒤 다시 임신 중인 38세에 사망한 부인.

터럭만큼도 험 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하던 아내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황제는, 22년에 걸쳐 궁전 형식의 무덤으로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상징을 축조했다.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전문기술자들이 왔다. 미얀마, 중국, 오스만제국, 이집트에서까지 건축자재를 수입했다고 한다.


19년 동안 14명의 자녀를 낳고 죽은 황후에 대한 사랑의 상징인가? 건축예술의 걸작 타지마할.


건물 전체가 흰 대리석인 타지마할의 꼭대기 높이 약 65m에 달하는 중앙 돔 사방을 호위하는 듯한 50m 정도의 첨탑 등,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완벽한 대칭을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건물 밖의 정원, 연못 등의 배치 또한 완벽한 대칭이다.

눈부신 순백의 외관은 날씨나 햇빛 방향에 따라 수시로 분홍색 은백색 등 빛깔이 달라져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 내부에 새겨진 꽃 모양의 조각들과 거기에 박힌 갖가지 보석들도 빛의 각도에 따라 색감이 다르다.

때문에 타지마할 관광에서 빠트리지 말도록 전해지는 것이, 석양에 비친 외관과 안내자가 프래쉬로 비쳐주는 건물 내부의 조각 등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지만, 당시 계속되는 건축공사에 백성도 신하들도 저항이 심했다. 타지마할 외에도 아그라성(Agra Fort), 델리의 레드포트(Red Fort), 자마마스지드(Jama Masjid) 등 유난스러울 만큼  건축에 대한 집착이 재정난의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1658년 셋째 왕자 아우랑제브(Auranzeb; 1618~1707)의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타지마할에서 2km 정도 떨어진 아그라성(Agra Fort)의 탑에 유폐돼 말년을 보내야 했다.

갇힌 성탑 창문 너머 보이는 타지마할에 있는 아내를 그리다가 1666년에 사망했다. 6대 황제에 올라있던 불효자식은 그나마 아버지의 유해를 어머니 옆에 안장하였다.


[이 인도이야기는 잡지 “큰그릇”(2019년 4~6월호)에 필자 실명(김백순)으로 게재한 ‘스토리가 있는 여행’ 기사와 일부 내용을 공유합니다.]

2019-04-26

겸재(謙齋 鄭敾)와 사천(槎川 李秉淵)

 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하여 조선의 고유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진경시대’라 할 수 있는데, 겸재 정선으로부터 비롯된다.
금강산 관동팔경 등,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진경회화의 토착화를 이루었고 풍속화의 경우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려냄으로써 회화 소재의 폭을 확대하였다. 겸재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시도는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 등으로 이어졌다.

겸재(謙齋 鄭敾,1676∼1759)
몇 대째 과거 급제자 없던 양반가 출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관직도, 명성도…
시서화 일체 중시…당시 문인들 추세=> 진경(眞景)산수화 물꼬
전통 수묵화법, 채색화에 더하여 자신 만의 필묵법 활용.

300여년 전 그림=>이 지역 풍경 복원의 토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수성동(水聲洞)’ =>계곡 복원의 토대
‘장동(壯洞);인왕산 남쪽기슭~북악산 계곡…효자, 청운, 옥인동 지역…

76세 작품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응축된 정기 + 강인함 충만
산 중턱 운무에 감싸인, 정자 한 채… 시적 정취…

[비교] 고흐(1853~1890)와 프랑스의 두 도시
네덜란드 출생, 1888년 남불 아를로 이주… 해바라기, 카페, 다리 등 소재 적잖은 작품
1890년 파리 북쪽 '오베르 쉬르 우아즈'마을에서 권총 자살.
극적 삶의 흔적 밴 두 도시….대부분 작품 배경 없어졌지만 그림 토대로 사라진 흔적 복원하거나 관련 작품 전시

겸재는 이병연(李秉淵) 등과의 교유를 통하여 일상 속의 자연과 생활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사천이 겸재보다 5살 연상이지만아주 가깝게 사귀고 정이 두터웠다. 당시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 아니면 쳐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시와 그림이 유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
이병연의 시 + 정선의 그림=> 상호 보완적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약속 아래 서로 작품 비평, 격려… 조선 예술사상 화려한 꽃 피워
시냇가 풀밭 노송 아래 두 노인이 시축과 그림을 놓고 비교하며 담론하는 한유(閒遊)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실린 이병연의 화제(畵題);

“나와 겸재는 시가 가면 그림이 오도록 왕복을 기약하여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 하였다. 시와 그림의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서 이루어지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더라.”

겸재가 사경 헤매는 이병연의 쾌유를 빌면서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 216호, 리움미술관) 그림도 있다.
“제색”이란 “큰비가 온 뒤 막 개일 때의 풍광”이란 뜻. 1751년 윤 5월의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이렛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비가 내리다가 25일 오후에 완전히 개었는데, 바로 그날 오후 겸재가 이 그림을 단숨에 그렸다고 한다.
이병연은 이 그림 그려진지 나흘만인 5월 29일에 눈을 감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