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1

[스토리 투어] 북촌 별궁길 산책

 조선말기만 해도 “한양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불렀다고 한다.(黃玹; 梅泉野錄)

종각 남쪽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에는 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상인들이 모여 살던데 비해, 왕족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었다. 요즘에는 율곡로의 북쪽,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 지역으로 이해된다. 북촌 서쪽지역 속칭 별궁길 일대는 근대역사의 숨결을 반추하며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안동별궁 터에 민영휘의 부실이 세운 풍문여고

도로명 주소로는 윤보선길인데, 안국역 1출구 옆에서 안동교회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고종18년에 세워져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결혼한 안동별궁에서 유래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화재가 나서 타버리고, 해방 직전, 풍문여학교로 개교했다. 풍문여고는 현재 강남 내곡지구로 이사하여 남녀공학이 되었고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선학원,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민족불교의 성지,광복 후에는 왜색 불교를 청산하는 정화불교의 산지로 조계종의 모태 역할을 했다.

명성황후가 이름 붙인 '감고당' 터의 덕성여고

덕성여고 자리에 감고당(感古堂)이 있었다.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에 지어주었다는데, 장희빈과의 알력으로 폐위된 후 이곳에서 5년쯤 거처하였다고 한다. 뒷날 얘기지만, 1866년(고종3) 이 자리에서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도 어린 시절을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인현왕후의 과거를 느낀다는 의미로 '감고당(感古堂)'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명성황후였다. 감고당 건물은, 덕성여고가 들어서면서 쌍문동 덕성여대 학원장 공관으로 옮겨졌다가,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터 옆에 복원되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를 생각하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섭섭이'는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했다고 한다. '미리사'는 기독교 세례명에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스물 셋의 나이에 상하이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활동, 교육, 독립운동 등에 열성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캔자스시티 스캐리트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12년에 귀국, 배화학당 교사로 사감을 맡기도 했다.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 여성들로 구성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며 주부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타파, 생활개조, 남녀평등 등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여,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했다.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여성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 적령기를 지나고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 대상이었다.
근화학원-근화여학교-근화여자실업학교로 변경되었다가 무궁화 뜻을 가진 ‘근화’를 트집잡는 일제의 압력으로,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재정난이 심해져 1940년 송금선(宋今璇)이 학교의 운영을 맡아, 같은 해 8월 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재개교하였다.

안동교회와 소허당(笑虛堂)

별궁길과 감고당길이 만나는 골목에 근대사를 지켜본 두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가다.
안동교회는 현재 예장통합 장로교회지만, 양반들이 모여 만든 첫 평신도 교회. 1909년 박승봉, 김창제, 유성준의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도 다닌 교회 본당 옆에 한옥 별채가 있다. 안동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공모해 정한 이름, 소허당(笑虛堂) 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집자한 것이란다. 자그마한 중정과, 바깥으로 툇마루를 낸 한옥. 웃으며 마음 비우란 뜻 아닌가? 평일에 무료 문화 강좌가, 1년에 10여 차례 교회 음악 중심의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기도 한다.

윤보선 가옥

고종 7년(1870) 건립,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이 1910년경 매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박영효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7~8세경에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집무를 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한 장소이고 1950~1970년대 야당의 사무실 겸 회의실로 사용되었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한 한국정치사적 의의가 큰 곳이다.
19세기의 양반가옥으로 민가 최대라는 99칸이란다. 못들어가봤지만, 사랑채 뒤뜰에 연못이 있고 매화,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19세기 말 전통 조경에서 새롭게 조성된 근대 조경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구한말 세도가의 위용과 건축 양식 및 주거의 변천과정 알 수 있는 건축 문화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어 사적 제438호로 지정된 비개방 가옥이다.

조선어학회터

일제치하이던 1921년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어연구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우리 민족의 ‘혼’인 한글을 지키기 위해 결성한 단체다. 그 명칭은 1931년부터 ‘조선어학회’로, 1949년 ‘한글학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2년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고 있을 무렵의,‘조선어학회사건'을 떠올려보자.​

개화파 몰락한 집터의 옛 경기고등학교 터

1900년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관립중학교 설립된 당시의 학교터는 김옥균(金玉均)의 주택지였다. 이후 서재필과 박제순의 집터가 합쳐지면서 꽤 넓은 부지가 되었다. 1884년(고종 21)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들이 소유한 집들을 조선 정부가 몰수한 것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 경기고등학교로의 변경 과정은 우리 공공교육의 변천사를 상징한다.
1938년에 경기공립중학교 신교사로 낙성된 건물 본관은, 당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3층 최고급 학교 건축물이었다. 우리나라 관학 중등교육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가 청담동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운영된다. 입구에 서울교육박물관도 있어 학창시절의 추억도 더듬어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경복궁에 개관했다가, 덕수궁 석조전을 거쳐, 1986년 과천으로 이전했다.

1998년 옛 덕수궁 자리에 다시 분관, 2013년 경복궁 건너편 소격동 기무사 터에 서울관, 2018년에 청주관을 개관했다.
과천관은 건축/디자인/공예 위주. 덕수궁관은 역사의 숨결 느껴지는 국내외 근대 미술 위주로 전시한다. 서울관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 기획전으로 운영된다. 청주관은 작품 수집과 보관 위주다.

민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설계했다는데, 2010년대 신축 3대건물에 대해 이런 평가도 있다.
“… 찌그러진 유리 온실 모양의 서울시청, 괴물을 연상케 하는 DDP는 '일제시대 유물 청산'이라는 사회적 구호에 등 떠밀리고, 설계와 건축 입찰비리 척결에 몰두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건축물'이 아닌 날림의 '건물 덩어리(혹은 더미)'를 만들어 버린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주위의 경복궁, 북촌의 한옥집들을 공경하고 조화를 꾀하면서도 반듯하도 넓직한 개방감을 이루어냈다….”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터는 조선시대 사간원, 고종시대에 종친부, 구한말에는 규장각이 옮겨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1920년대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세워져 해방 뒤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 국군병원을 거쳐 70~80년대 보안사(기무사)가 들어섰다.1979년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 주검이 처음 안치됐었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쿠데타를 모의했던 터이기도 하다.
당초 이곳에 종친부가 자리했던 것은 경복궁 건춘문이 종친들과 외척 및 상궁들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종친부 중심 건물 경근당과 옥첩당은 1981년 떼니스장 설치 이유로 정독도서관 관내로 쫒겨났다가, 2013년에 원래 터로 복원되었다.
[사진: 양철배작가, 옥우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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