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아! 명동... 거기 담긴 역사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명동은 여러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다방과 술집을 드나들던 문화예술인, 카도릭 성지, 백 여년 전부터 자리잡은 중국과 일본의 흔적, 관광객... 자료를 구하는 대로 틈틈이 보완하며 시대순으로 정리해본다.

K-Pop의 뿌리? 국립음악기관 '장악원(掌樂院)'

K-Pop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가무(歌舞) 전통은 꽤 유서가 깊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던 기록이 나오는 오래된 중국 문헌(진나라 시대 진수(陳壽)가 297년에 지은 "삼국지(三國志>魏志東夷傳)", 남송 시대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東夷傳)" 등)에 나오는 선사시대 우리나라 가무(歌舞) 문화는 제천의식을 통해 며칠간 음식을 차려놓고 남녀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행사를 벌였다.
부여 12월에 영고(迎鼓), 고구려 10월 동맹(東盟), 동예 10월 무천(舞天) 등이 그것이다.
마한에서는 5월에 파종한 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무리를 지어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10여 명이 서로 따라가면서 땅을 밟고 구부리고 펴는 동작의 손발이 잘 맞았다고 한다. 10월 농사일이 끝나고서도 이 같은 행사를 다시 하였다는데, 농경사회에 있던 전형적인 음악문화로 최근까지도 두레풍장굿이라는 농악(農樂)의 한 형태로 전승되었다.

주제를 벗어나니 이쯤에서 그만 시대를 건너뛰어 보자.
조선은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다. 따라서 음악을 통치 방편의 하나로 인식하고 별도로 음악 기관을 두고 왕실의 의례를 행하도록 했다. 조선 초 역할에 따라 다섯개로 나뉘어 있던 궁중음악 기관은 1457년(세조 3) 악학과 관습도감을 합하여 악학도감이라고 칭하였다. 향악과 아악으로 구분한 전악서와 아악서를 합하여 장악서라 칭하고, 이를 악학도감에 예속시켰다. 이 장악서가 나중에 장악원으로 개칭됐는데, 이 명칭은 1466년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나타난다고 한다. 국립음악기관이랄 수 있는 장악원 건물이 완공된 뒤 기록된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에는 우리 선조가 음악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단한(!) 표현이 나온다.
"사람으로서 음악을 모르면 기운을 펼 수 없고, 음악이 없으면 바른 나라의 이룰 수 없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한 엑스포인 콜럼버스 미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장악원 악사들이 파견됐다고 한다. 당시 기와집 8칸짜리 형태의 전시실을 설치했다는데, 조선의 음악이 중국과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좋은 수단이라는 미국 선교사 알렌의 충고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장악원 터 표석이 을지로쪽 명동입구 하나은행 앞에 놓여 있다. (사진)

‘어부사시사’, ‘오우가’ 지은 윤선도(孤山 尹善道) 집터

1587년 한양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8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전라도 해남에 내려갔다. 26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광해군, 인조 반정, 병자호란 등의 시기를 거치며, 귀양생활, 왕자의 스승, 의병 지휘자 등 부침을 거듭했다.
54세 때인 1640(인조 18)년에 다시 내려가 말년엔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보길도에서 학문 연구와 시 짓기에 몰두했다.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벗으로 삼은 ‘오우가’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린 시조로 유명하다.
한글 창제 백여 년이 지났지만 당시 풍조상 어른들 몰래 누나에게 배운 한글로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 75수가 전해진다. 1671년에 사망.
명동성당 맞은 편 NH농협 건물 앞에 윤선도 집터 표석이 놓여 있다. 

18세기말 명례방 지역과 천주교
1784년(정조8) 청나라 사절(冬至使) 일행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薰)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귀국한 이승훈은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한 김범우(金範禹)의 명례방 집(장악원 터 부근)으로 집회 장소를 옮겨 성사를 집전하는 등 일종의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당시 바티칸의 정식 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사실상의 교회 역할을 하는 집회소를 세운 매우 특별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곳에서 집회를 열었던 이들을 '명례방 공동체'라고 하는데, 이듬해인 1785년 적발되어 집주인 김범우는 밀양으로 유배된 뒤 1년여 만에 형벌 여독으로 37살에 숨을 거뒀다. 천주교를 믿다 죽음을 당한 최초의 인물로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이다.

조선의 쇠락과 외세의 진입

조선말 서양식 훈련을 받은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가 충돌하면서 1882년(고종19) 군란(壬午軍亂)이 벌어졌다. 진압 명분으로 청나라에서 3천500명의 병사를 파견했는데, 그 일부가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주둔했다. 이때 함께 들어온 청나라의 조달상인(군속)들도 부근에 식당 등 각종 가게를 열었다. 188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이 주둔지에 공관을 짓고 10년 가까이 머물렀다. 청나라는 이 자리에 중화회관(상공회의소에 해당)과 상무공서(영사관에 해당)를 세웠고, 상권도 더 커지며 다양한 중국문화가 유입되었다.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한성조약이 체결되며 일본인들도 이 땅에 터를 잡아갔다. 1885년 조선정부는 현재의 명동성당과 백병원 사잇길 일대를 공식적으로 일본인 거주지로 지정했다. 그 무렵 백 명이 채 안됐던 일본거류민이 10년 뒤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 말에는 2천명으로 늘었다.
1896년 이후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섰고 후에 경성부청으로 바뀌었다가 1930년 미츠코시백화점이 개업했다.
러일전쟁시기인 1904년에는 일본인거류민의 수가 5천여명에 이르렀고, 1910년대 일제강점기의 명동(明治町)은 충무로(本町)와 남대문통 을지로(黃金町)와 더불어 상업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 상점 진출이 확산되며 귀금속, 의류, 식음료 등 다양한 상가가 들어섰다.
청나라 상무공서 건물도 1910년 이후 한때 일본인이 차지했지만, 1920년대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중국 소유로 바뀌었다. 광복 후에는 중화민국(타이완정부)이 건물을 지어 대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992년 한중수교 및 대만 단교에 따라 명동 부지는 중국 측으로 넘어갔다. 청-일본-대만-중국을 거치는 이 건물의 역사는 격동의 근대 동아시아사의 상징이다.

한옥 대저택 자리에 세워진 성당 앞에서 칼 휘두른 이재명

조선이 몰락의 길로 서서히 접어들며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 흥선대원군 사망 세달 뒤인 1898년 5월, 엄청났던 기독교 탄압이 끝났다는 듯, 수도 한복판에 그 상징인 천주교 건물이 우뚝 섰다. 처음 이름은 ‘종현성당’이었다.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이 소유했던 대저택 자리였다. 바깥채만도 60여 칸이나 되는 한옥을 1883년 프랑스 국적의 초대 주임신부 블랑 주교가 넘겨 받아, 거의 4년 동안 그대로 교회당으로 이용하다가, 현재와 같은 고딕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의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7년 이후였다.
명동성당의 하늘로 우뚝 솟은 본관 건물 밑 지하는 종교적인 관점으로는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앵베르(한국이름 范世亨) 주교를 비롯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는 1837년부터 전도활동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 당했다. 이분들을 포함 모두 5?분의 신부와 무명 순교자 2위 등의 유해가 함께 모셔져 있다.
사적 258호로 지정된 고딕식 건물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이었다고 한다.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순교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09년 12월에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을 습격했던 의거도 있었다.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은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추도식을 마치고 인력거를 타고 나오던 이완용을 여러 차례 찌른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목숨은 건졌고, 이재명 의사는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되어 1910년 5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에는 이런 말이 담겨 있다.
“.....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했으며, 의거를 공모한 조창호, 이동수,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명당성당 입구에 ‘이재명의사 의거터’ 표지석이 놓여있다. (사진)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 6형제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인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1932) 선생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 1907년 4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하고 같은 해 6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함께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 서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10년 동안 3천500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에는 상해입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독립운동과 의열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1932년 일경에 검거되어 순국하고, 다른 형제들도 망명지에서 사망했는데,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시영(李始榮·1869~1953)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윤선도 집터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으로 추앙되는 독립운동가 집안 여섯 형제 집터 표석이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함께 놓여있다. (사진)

우리 자본시장의 시발점? '조선취인소'
1880년 유길준,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을 통해 처음으로 주식회사 제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자본을 모아 큰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제도 자체가 없었던 시대에 주식을 어떻게 모집하고 매매하는지 알렸으며, 1880년대 후반, 주식회사의 도입 이후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거래가 어느 정도 활발해지자 1920년 조선총독부는 '경성현물주식취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거래소 개설을 허가하였다.
우리 자본주의의 시발점이었던 명동의 조선취인소는 사라졌고 증권거래소의 명맥으로 공인되지도 않는다.

일제 침략기관에 폭탄 던진 나석주 열사

일제강점기에 금융회사로 진입해 우리 땅을 강탈하고 농민을 착취하는 역할을 맡았던 침략기관으로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의열단원으로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나석주는 1926년 12월 국내에 들어와 남대문통에 있던 식산은행에 폭탄 1개를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고, 동양척식회사를 습격, 직언들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폭탄 1개를 투척하였다.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포위
되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 말고 분투하라”는 말을 남기도 자신의 가슴에 권총 3발을 쏴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은 장악원터 옆이다. 나석주의 동상과 함께 표지석도 놓여 있다. (사진)

1930년대의 클래식한 극장 건물

상업시설로 즐비한 명동거리의 한 복판에 예사롭지 않게 클래식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있다. 명동예술극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10월 ‘메이지좌(明治座)’라는 이름으로 개관, 일본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다. 미군정기인 1946년에 ‘국제극장’, 1948년에 ‘시공관’, 1957년에 명동예술회관, 1962년에 국립극장으로 개칭해왔지만 극장의 역할을 해왔다. 1973년 국립극장이 현재의 남산기슭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민간에 매각되어 1976년부터 10년간은 대신증권 간판이 걸렸었다. 2003년에 문화관광부가 다시 인수하여 2009년 6월부터 연극 전문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 외부 벽면은 1930년대의 옛 모습을 살려내고, 내부는 완전히 리모델링, 최신 무대시설을 갖춘 600석 규모의 극장으로 재탄생했다.
1936년 개관 이래 근현대 문화예술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10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광복 전후 명동의 사랑방들
해방 직후 정부 수립까지의 혼돈기에도 차 한잔 시켜놓고 죽치던 나름대로의 ‘다방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11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커피와 재즈 - 다방은 안식처’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시내에만 다방이 100여곳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다방은 1927년 관훈동에 있던 ‘카카듀다방’으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이경손이 경영했다고 한다. 벽에 탈을 걸어 놓고 턱시도를 입은 이경손이 직접 차를 나르고 화가, 문인, 기자들이 모였는데, 몇 개월만에 운영난으로 폐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다방 손님이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았던 것은 경영주의 영향도 컸던 때문이기도 했다. 극작가이자 음악평론가였던 김관의 ‘에리사’ 등이 명동에 있었고, 소공동이나 종로 등에 있던 유치진, 배우 복혜숙의 다방도 유명했다. 1933년에 개업한 이상의 제비다방은 부인(금홍)이 운영했던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35년 문을 닫고 광교 부근에 개업하려던 ‘69다방’은 이름이 외설적이라는 진정이 들어와 허가가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여류문학가 손소희·전숙희·유부영씨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마돈나’의 분위기를 소설가 이호철이 ‘문단골 사람들’(1997)에 기록한 글을 인용해본다.
“… 좁다란 다방 한구석에서는 동리와 다방의 주인마담 손소희가 나란히 앉아 사랑이자 문학을 속삭이고, 또 한쪽 정지용과 모란의 시인 김영랑이 얼멍덜멍 앉아 있는 그 한켠에서는 이용악이 술에 취한 채 웅얼웅얼 자신의 시를 읊조린다.”
이렇게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만남의 공간 같은 사랑방 역할을 했다. 문인들의 집필실, 예술인들의 아이디어 공간, 때로는 전시장 역할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모나리자, 문예싸롱, 동방싸롱, 청동다방, 돌체 등을 꼽을 수 있다. 박인환이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모자란 술 값 대신 모나리자에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문예싸롱’은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 당시 문단을 주름잡던 문인들이 출입하던 다방으로 문단 추천, 원고청탁, 논쟁, 연애, 싸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유네스코회관 바로 앞에는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은성주점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사진).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나애심, 천상병, 김관식, 김수영..... 현재까지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누비던 공간이다.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는 거의 매일 이곳에서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6.25전쟁과 명동 그후- 통기타와 고고장

퇴계로쪽 명동 입구 밀리오레 건물 자리는 우리 해군과 인연이 깊다. 6·25 휴전 뒤인 1953년 8월 해군본부가 자리 잡았으며 그 이전 해군이 정식 발족하고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수원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도 본부로 사용됐던 장소로 추정되기 때문이다(최초의 해군본부는 영등포구 신길7동).
6.25 전쟁 때는 명동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 측에서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전해진다.
휴전후 현대식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1950~60년대 명동 곳곳의 다방들은 다시 문화, 예술인 출입으로 분위기를 쌓았다. 예술과 낭만거리라는 표현도 등장했고, 유흥, 오락, 의상, 양장점 등 패션가도 형성됐다.
오비스캐빈은 1969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통기타 살롱으로써 조영남을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트윈 폴리오와 양희은이 활동했던 무대였다. 그리고 이곳 주변으로 여러 고고장들이 있었다.

세계 최대의 호텔 사고- 대연각 화재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수십명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도 총 사망자 166명 중에는 뛰어내리다 추락사한 경우도 38명이나 되었으며, 실종자도 25명이나 되었다. 서울시내의 소방차들이 거의 다 출동했고 육군 공군 미군 헬기까지 지원했지만, 강한 바람과 당시로서는 21층이나 되는 고층이어서 쉽게 진압하지 못해 인명을 구조하기 어려웠다. 당시 국내 최고의 32m 사다리차도 7층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대형건물에 스프링클러 화재진압시스템 설치, 고층건물 옥상 헬리콥터 이·착륙장 확보가 법률로 의무화되어 시행되었다.
MBC-TV가 화재 현장에서 전국에 생중계해 주목을 받았는데, 생중계 방송이 처음 시작된 사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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