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6

겸재(謙齋 鄭敾)와 사천(槎川 李秉淵)

 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하여 조선의 고유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진경시대’라 할 수 있는데, 겸재 정선으로부터 비롯된다.
금강산 관동팔경 등,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진경회화의 토착화를 이루었고 풍속화의 경우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려냄으로써 회화 소재의 폭을 확대하였다. 겸재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시도는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 등으로 이어졌다.

겸재(謙齋 鄭敾,1676∼1759)
몇 대째 과거 급제자 없던 양반가 출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관직도, 명성도…
시서화 일체 중시…당시 문인들 추세=> 진경(眞景)산수화 물꼬
전통 수묵화법, 채색화에 더하여 자신 만의 필묵법 활용.

300여년 전 그림=>이 지역 풍경 복원의 토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수성동(水聲洞)’ =>계곡 복원의 토대
‘장동(壯洞);인왕산 남쪽기슭~북악산 계곡…효자, 청운, 옥인동 지역…

76세 작품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응축된 정기 + 강인함 충만
산 중턱 운무에 감싸인, 정자 한 채… 시적 정취…

[비교] 고흐(1853~1890)와 프랑스의 두 도시
네덜란드 출생, 1888년 남불 아를로 이주… 해바라기, 카페, 다리 등 소재 적잖은 작품
1890년 파리 북쪽 '오베르 쉬르 우아즈'마을에서 권총 자살.
극적 삶의 흔적 밴 두 도시….대부분 작품 배경 없어졌지만 그림 토대로 사라진 흔적 복원하거나 관련 작품 전시

겸재는 이병연(李秉淵) 등과의 교유를 통하여 일상 속의 자연과 생활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사천이 겸재보다 5살 연상이지만아주 가깝게 사귀고 정이 두터웠다. 당시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 아니면 쳐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시와 그림이 유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
이병연의 시 + 정선의 그림=> 상호 보완적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약속 아래 서로 작품 비평, 격려… 조선 예술사상 화려한 꽃 피워
시냇가 풀밭 노송 아래 두 노인이 시축과 그림을 놓고 비교하며 담론하는 한유(閒遊)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실린 이병연의 화제(畵題);

“나와 겸재는 시가 가면 그림이 오도록 왕복을 기약하여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 하였다. 시와 그림의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서 이루어지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더라.”

겸재가 사경 헤매는 이병연의 쾌유를 빌면서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 216호, 리움미술관) 그림도 있다.
“제색”이란 “큰비가 온 뒤 막 개일 때의 풍광”이란 뜻. 1751년 윤 5월의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이렛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비가 내리다가 25일 오후에 완전히 개었는데, 바로 그날 오후 겸재가 이 그림을 단숨에 그렸다고 한다.
이병연은 이 그림 그려진지 나흘만인 5월 29일에 눈을 감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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