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거리 많던 추억 속의 ‘갱갱이’
김 백 순
거창하게 역사나 문화로 포장하기는 멋쩍고 선명한 기억도 아니지만, 어렴풋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많을 것이다. 선악이나 진위의 분명한 구분은 날 선 긴장을 부르지만, 아리송하고 희끄무레한 감성은 전설이나 신화처럼 자유로운 공상이 보태질 여유가 있어 좋다.
나의 경우 갓난아이적엔 아버지 근무지였던 대전에서 컸다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저 강경에 살며 ‘백합유치원’을 거쳐 중앙’국민’학교, 강경중학교까지 다닌 것으로 새겨져 있다. 십대 중반에 고교 진학을 위해 상경한 뒤 십여 년간 서울 대전을 떠돌면서도 강경은 어른들이 계신 곳이라 언제든 거리낌없이 기댈 자리였다. 다른 지역 친구들은 ‘시골 강경’에 유치원이 있었고 내가 다녔다는 얘기를 들으면 대뜸, “그 시절 유치원? 잘 살았구먼”하는 반응을 보이며 놀라워했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온 동기생 마을에 합격 축하 현수막까지 붙었다지만, 강경중학교 출신으로서는 ‘서운하게도’ 그리 큰 경사는 아니었다. 강경은 나름대로 도회지였던 것이다.
1950~60년대 강경의 동네 이름은 지금의 ‘리’가 아니라 ‘동’,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논산경찰서가 아니라 강경경찰서, 법원 검찰도 논산지원이나 지청이 아니라 강경지원과 강경지청이었다. 한전지사도 있었고 읍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없었다. 한참 뒤인 1970년대 얘기지만, 지금 대전광역시에 속하는 흑석리 친구 집에 전깃불이 안 들어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웠었다.
지역경제가 좋았던 덕인지 우체국 말고도 은행이 두 개나 있었다. 오일장이 서는 4일과 9일이면 아랫장터 윗장터 대흥시장 등등에 우마차를 끌고 온 마소와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 자동차가 온 거리를 가득 메울 만큼 생기가 돌았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서도 강경은 이미 조선사대에도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번잡한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도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화교학교가 강경에 있을 만큼 중국인들도 많아, 다양한 가게를 운영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도 강경에서는 별도의 타운이나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섞여 살았다. 내 또래 여자아이가 살던 앞집 중국인 부부는 자주 중국말로 소리지르며 큰 싸움을 했는데, 남편이 도망쳐 나오고 덩치 큰 아내가 마구 쫓던 모습도 동네 구경거리였다.
내 또래의 꼬마들에게 강경은 특히 구경거리가 차고 넘쳤다. 약장사가 소개하는 진기명기, 건어물상에 쌓인 멸치를 집어 맛만 보는 공짜 손들, 소나 말이 똥이나 오줌을 싸는 모습, 서커스가 들어왔다고 알리는 행진과 풍악소리, 내용은 잊었지만 이따금 허공에 날려지는 대국민 홍보 내용이 적힌 삐라, 지나가는 트럭의 휘발유 냄새를 맡으면 회충이 떨어진다며 뒤쫓는 애들…
내가 다니던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엔 학부모가 아닌 어른들도 잔뜩 모일 때가 있었다. 정기적으론 운동회 날이 그랬다. 국회의원이니 뭐니 하는 선거유세도 있었고 한밤중 무슨 문화영화 필름도 돌려 온 동네가 북적댔던 기억도 있다.
60년대초의 어느 날인가, 갑자기 ‘잠자리 비행기’ 한대가 빙빙 돌며 엄청난 굉음으로 강경 하늘을 덮었다. 나도 친구들도 동네 어른들도 그 헬리콥터가 내리는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프로펠러에 날린 운동장 모래알들이 얼굴을 때리던 따가움이 지금도 느껴진다. 왜 갑자기 헬기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강경을 지나 군산으로 가던 미군 차량이 학교근처를 지나던 어린이를 치었는데, 이를 응급후송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좋은 일이던 궂은 일이던 당시엔 이런 모든 게 ‘구경거리’였다. 미군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헬로 초콜렛 기브 미”를 외쳐댔던, 지금 생각하면 창피스러운 행동도 예사로운 ‘장난’이었다.
개교한 지 120년이 가까워지는 이 중앙초등학교가 학생수 부족으로 최근 폐교까지 거론된다지만, 1924년 일제강점 당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선생님 한 분과 50여명의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시절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사설로도 다루었다. 앞장섰던 김복희 선생님과 학생들 상당수가 내가 어릴 때 살던 홍교동 집 바로 코앞의 강경성결교회 신자여서, ‘최초 신사참배거부 기념비’가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강경의 분위기는 낯선 종교나 외세에 대해서 칸막이로 단절하기 보다는 유연하고 퍽 느슨했던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러하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성결교회 여름성경학교에 빠짐없이 다니며 목사님 전도사님의 귀염도 받았고 동방박사 역을 맡아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혼식은 천주교성당에서 혼배미사로 했으며, 항공사에 근무할 때는 국제선 기내지에 유명 사찰탐방기를 연재했고 명상공부를 하면서 많은 스님들과 정기적으로 불교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래서인지 조그만 지방도시임에도 종교나 교육 관련 스토리가 퍽 많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금강 황산포와 바로 연결된 나바위였다. 처음 사목하며 머물렀던 신자 구순오의 집은 내가 살던 곳에서 100미터쯤 되는 거리다.
한국침례교회의 첫 예배지는 어딘가? 인천에서 강경으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 자택이다. 미국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부부 등 다섯명이 1896년 2월 9일(일) 첫 주일예배를 드려, 기독교 한국침례회가 태동한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사한 황산리 금강변에는,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우리 예학의 우두머리[宗匠]라 일컬어지는 사계(沙溪 金長生) 선생과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문화유적들이 모여 있다. 황산벌의 평야지대 한 켠 바로 옆 굽이쳐 흐르는 금강과 더불어 툭 터진 전망이다. 광산 김씨 내 선조이셔서 남달리 관심을 가졌던 사계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하던 임리정(臨履亭)이 중심이다. 1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팔괘정(八卦亭)은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스승 곁에서 당대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장소다. 명당 터를 소개한 유명한 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이 책 서문을 우암의 강경 집에서 썼다고 한다. 인근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은 선현들에 대한 봉사(奉祀)와 후진을 키워내는 교육 기능을 겸했다.
얼마 전 금강을 따라 임리정 앞 뚝방길을 걷다가 강경읍과 부여 세도면을 잇는 황산대교를 보며, 중학생 시절 나룻배를 타고 등하교 하던 강 건너 친구들이 생각났다. 장마철 물이 불어나면 그 친구들은 바지를 다 적시기도 했고 아예 등교도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친구들 강경에 편안한 집이 있는 내가 부끄러울 만큼 참 모범생들이었다.
문득 중학교 졸업 무렵 이 황산리 어디쯤에서 ‘치른’ 난생 처음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반백 년 훨씬 넘는 지금까지도 설레지는 ‘떨림’. 서울행 유학 시험을 마치고 강경중학교 졸업하러 다니러 왔을 때, 두어 달이나 못 보다 만난 후배 여자애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겁결에 부둥켜 안다가 그리 됐다. 단정적으로 고백하건대 그건 고향이 주는 ‘순수한 자신감’이 가져다 준 ‘보상’이자 엄청난 ‘황홀’이었다.
세월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을 엮어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다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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